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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01/ 바니타스

어느 맑은 가을날, 중국 어느 한 시골에 사는 지인(知人)의 모친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이 모친의 장례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절차를 따라 시신을 화장(火葬)하려고 유족들과 함께 화장터로 갔다. 화장 수수료를 지불하고 두 시간 후 유골을 찾아갈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화장터 마당으로 나와 벤치에 앉았다. 모친의 지난날을 회상하며 물끄러미 마당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홀연히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 마당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을 때, 파란 하늘을 날아가는 화장장 굴뚝의 연기를 발견할 수 있었고, 방금 마당을 스쳐가는 그림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바로 모친의 것이었다.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시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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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니타스 정물화 Vanitas Still Life, Pieter Claesz (1597-1660), 1630.

바니타스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유행했던 ‘바니타스’(vanitas; 라틴어로 ‘덧없음’이라는 뜻)라는 정물화 양식이 있다. 이 정물화 작가들은 인생의 무상함, 죽음의 불가피성, 속세의 업적이나 쾌락의 덧없음과 무의미함을 상징하는 소재들을 주로 다루었다.

피터 클라스(Pieter Claesz)의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볼 수 있는 해골, 멈춘 시계, 꺼진 등잔, 엎어진 물잔 등은 그 물건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강한 상징성이 감상자로 하여금 인생무상의 깊은 사색 가운데로 젖어들게 한다.

 

 “인생이 허망하다”라는 말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왜 이렇게 허망한가?”, “정말 허망이 전부인가?”, “벗어날 방법은 없는가?”하는 사색이나 궁구(窮究)하는 일에 삶을 투자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세상이다.

이 문제는 철학자나 종교 하는 사람들만의 몫이 아니라, 모든 인생에게 주어진 숙제이고 유업이다. 

“먹고 살기 바쁜데……”, “자식 키우는 재미로……”, “내 인생을 위하여……” 혹은 “남을 위하여” 산다고 하지만 이 ‘헛것 같은 그림자 인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식 하나 열심히 키운 결과가 ‘헛것 같은 그림자 인생’ 한 명 더 복제한 수고라면 정말 허망하지 않은가?

 

이 세상에 충만한 공중의 세력<엡2:2>이 인생들로 하여금 절망적인 상황을 감각하지 못하게 하지만, 하나님은 인생의 마음을 두드리시고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 치듯 교훈하신다. <욥33:16>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얻은 ‘자신을 아는 지식’은 생명을 얻는 지혜와 연결되어 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 <시39:4,5>

 

다윗의 손 넓이가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으나, 나의 한 뼘은 23cm이다. 23cm 앞에 사망이 기다리고 있다.

 

하늘의 별을 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얻었는데, 하늘의 별을 보고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 1942~2018)은 “하나님은 없다”고 한다.

셀 수 없는 광대한 별의 세계 앞에서 아브라함은 먼지와 같은 자신이 보였지만, 호킹의 계산속에는 ‘자신을 아는 지혜’가 결여되어 있다.

 

성서를 근거로 한 시각으로 인생을 표현한 화가가 있다.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1593-1652)인데, 투르의 그림에는 보다 극적인 ‘바니타스’의 세계가 연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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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앞의 마그달렌 Magdalene of Night Light, Georges de La Tour,

Oilon canvas, 128 x 94 cm, 1630-35. Museedu Louvre, Paris.

등불 앞의 마그달렌

 

마그달렌(Magdalene)이라는 단어는 보통 the와 함께 사용하여 성서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를 뜻하기도 하고, 소문자 m을 사용하면, 새 삶을 사는 매춘부라는 뜻이 된다.

 

등불로 인하여 드러난 세계는; 어깨를 드러낸 채 등불을 응시하고 있는 여인, 투명한 유리 그릇 등잔과 그 속에 있는 짤막한 심지, 맑은 기름(녹아 있는 밀랍?), 상 위에 방치되어 있는 듯한 나무 십자가와 책(구약과 신약 성경?), 그리고 끈이다.

 

타오르는 불꽃을 응시하고 있는 여인은 한 손으로는 턱을 괘고, 한 손은 무릎 위에 놓은 두개골(頭蓋骨) 위에 얹고 있다.

지독한 적막이 흐른다.

한 점 공기의 이동도 용납지 않는 정지된 시간이 화면을 지배한다.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욕망, 그리고 이미 드러난 짤막한 심지와 같이 예정된 인생의 결과, 욕망을 따라가는 삶에 얼룩진 죄에 대한 고통, 그리고 자책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

 

생각에 잠긴 이 여인과 십자가는 아직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십자가는 심각한 상황의 여인에 대하여 무관한 듯이 누워있고 여인의 눈은 십자가가 아니라 타오르는 촛불에 고정되어 있으며 그의 두 손은 사망이라는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깊은 사색의 세계를 연출해 내고 있다.

 

우리는 결국 투르의 화면에서 그의 표현 의도를 감지해 낼 수 있다. 그것은 촛불이 지니는 특수한 조명 효과를 극대화 시켜 화면의 전체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화면상에 배치된 극히 상징적인 인물과 기물을 통해 작가의 마음에서 경험되고 형성된 인생에 대한 질문과 해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투르의 화면은 감상자로 하여금 깊은 사색의 세계로 이끌어 갈 뿐만 아니라 회피할 수 없는 인생에 대한 질문을 듣게 한다.

 

촛불은 지금 빛을 발하지만,

잠시 후에는 소멸될 어두움입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있는 것 같지만,

잠시 후에는 촛불처럼 꺼져버릴 존재입니다.

불꽃같은 욕망과 그 욕망으로 말미암은 죄악된 삶의 지울 수 없는 흔적……,

그리고

어제보다 더 가까이 다가와 있는 사망이라는 심연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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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의 경배, Georges de La Tour, Oilon canvas, 128 x 94 cm, 1644c.Museedu Louvre, Paris

목자들의 경배

 

이 그림에서 등불은 사람의 손에 가려져있다. 화면을 구성하는 내용의 주제이자 작가 마음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아기 예수’를 빛으로 표현하려는 의도 때문일 것이다. 등불이 가려지므로  아기 예수가 밝은 빛으로 화면 속의 공간을 밝히고 있다.

 

화면의 내경에 흐르는 분위기는 적막이 아니라 ‘소망’이다.

‘등불 앞의 마그달렌’에서의 빛은 인생의 욕망과 죄악을 드러내며 꺼져가는 빛이지만, 이 그림에서 아기 예수는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모든 사람들에서 생명을 주는 어린 양의 형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빛으로 투르는 표현하였다. 이는 표면적이고 종교적이며 형식적인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탄생(Nativity)’을 그린 것이 아니다. 당시 농촌의 리얼한 일상을 근거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사실주의적 표현 세계이다. 예수의 탄생이 먼 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가까이, 바로 자신들의 사건으로 취급되어지기 바라는 의도적인 작가의 견해가 화면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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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소에서의 그리스도, Christ in the Carpenter’s Shop, Georges de La Tour,

Oilon canvas, 137 x 101 cm, 1645. Museedu Louvre, Paris

목공소에서의 그리스도

 

목수 아버지 요셉은 허리를 굽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어린 예수는 불을 밝혀 아버지의 작업을 돕고 있다. 어린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일을 하는 정다움……, 이 정경(情景)이 화가가 원하는 표현의 전부일까? 이 화면에는 정다움 그 이상의, 그야말로 지고(至高)한 감동의 세계가 연출되어 있다.

 

‘목자들의 경배’처럼 이 그림도 어린 예수가 빛을 발하는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불을 밝히는 어린 그리스도, 촛불을 살짝 가린 어린 예수의 손, 불빛을 다 차단하지 못하고 반투명체가 되어 은은한 빛을 발하는 주옥같은 손의 묘사는 화면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기에 충분하다. 빛과 예수가 하나의 광채가 된 조명에 드러난 요셉의 형상은 사뭇 진지하다. 허리를 굽히고 두 손으로 드릴을 힘주어 잡고 있는 자세는 촛불에 가깝게 비춰지게 하는 작가의 의도적 표현을 느끼게 한다. 감상자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이르면서 돌연 뜻밖의 상황을 발견하게 된다. 요셉의 눈이 젖어 있어 보인다.(퀄리티가 떨어지는 복제 사진을 근거로 설명되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이 투르의 화면에는 그의 성서적 견해가 담겨있다. 어린 예수 앞의 요셉은 아비로서가 아니라 대속자 앞의 속량을 입는 한 인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대오감읍,(大悟感泣; 큰 깨달음에 감동되어 운다는 뜻) 요셉의 눈에 맺힌 눈물을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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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소에서의 그리스도 (부분)

“향나무는 찍는 도끼에 향기를 묻힌다.”는 말처럼 예수는 죄인을 위하여, 자신을 죽이는 자를 위하여 십자가에 오르셨다. 마치 고려장(高麗葬; 고구려 때, 늙고 병든 늙은이를 산 채로 깊은 산중에 버려 장사지냈다는 풍속)하고 돌아가는 아들이 길을 잃을까봐 돌아가는 길목 길목의 나뭇가지를 꺾어 놓은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세계이다.

 

주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았다고 외쳤던 베드로가 예수를 저주하며 세 번이나 부인한 자기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면서 통곡했다. 이 눈물은 정죄에 빠진 눈물도 아니고 용서를 비는 참회의 눈물도 아니다. ‘말씀대로 자신의 주를 부인하고 있는 자신’과 ‘말씀대로 십자가에 올라가고, 부활하여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말씀하신 예수’가 기억되면서, 이 두 가지의 세계가 만나는 곳에 형성된 감동의 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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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회개 The repentance of St Pete

투르의 화면에 그려진 어린 그리스도의 붉게 비춰진 손가락의 살 속에 흐르는 보혈은 결국 요셉을 위하여,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흘려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어린 예수의 도움을 입어 일하는 목공의 손에 만들어진 목재(木材) 십자가에 달려질 것이라면……, 지나친 상상인가?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0> 

 

이슬이 찬 것과 더운 것이 만나는 곳에 맺혀지는 물방울인 것처럼 바나타스 인생의 저주와 하나님의 긍휼이 만나는 십자가가 새겨지는 마음에 이슬이 맺힌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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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소에서의 그리스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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