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구원의 복음-표지.jpg

신간 안내/ 구원의 복음

김동성 글

국판, 228p

ISBN 979-11-955771-2-5

 

종이책 구매 안내:

아래 이메일로 주문 신청할 수 있습니다.

dskim824@hanmail.net

서언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높은 하늘에도, 깊은 바다에도 하나님은 계시고, 고통 중에 있는 나환자촌에도, 단란한 가정에도 그리고 술집이나 디즈니랜드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그러나 어디든지 하나님이 계시지만 아무나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고, 그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렸기에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이지만 죄가 해결되지 않는 한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영원한 행복이 있습니다.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모든 은사나 직분, 지혜, 능력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떤 것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더 읽기-

차례

1. 진정한 교회와 성도

2.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3.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4. 유월절의 어린 양 되신 예수

5. 의문에 쓴 증서를 제하신 예수

6. 희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7.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

8.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속 곧 죄 사함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책 속으로>

6. 희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대개의 사람들이 안식년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서 알지만, 희년이라는 말은 귀에 익숙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희년이 안식년보다도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준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은‘이에는 이, 눈에는 눈, 팔에는 팔’이라고 해서 행동에 따라서 대가를 지불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잔인한 법으로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율법 속에도 은혜를 숨겨 두셨습니다.

율법을 자세히 연구하면, 그 속에서 예수님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율법대로 끊임없이 지키는 사람은, 

‘아하!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그대로 지키라 하신 것이 아니라, 참 안식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시기를 원하시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안식년을 기키다 보면, 

‘하나님께서 한 해씩 안식년을 그냥 지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이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맛보게 하시는 거구나…….’ 하고 좀 더 깊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안식년의 일곱 번째인 제49년 안식년 그 다음 해가 희년입니다. 그 해에는 모든 종들에게 자유가 공포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 희년이라는 율법을 지키다 보면, 모든 것이 풀려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 희년은 바로 장차 오실 예수님을 설명해 주고 있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희년이 오면 종들이 다 풀려서 자유롭게 되는 것처럼, 희년이신 예수님이 오시면, 죄에 묶여 있던 사람이 죄에서 풀려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표면적으로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49년 다음해인50년째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진짜 우리 영혼을 죄에서 풀어주신, 희년이신 예수님을 바라야 할 것입니다.

 

죄의 소산인 일과 고통

 

사실, ‘일’이라는 것은 아담이 죄를 범하고 난 뒤로부터 생겼습니다. 그 전에는‘수고’라는 것이 없었는데,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다음부터 나뭇잎을 엮어 치마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고 저주하심으로 이 수고가 범죄 이후 우리에게 따라온 것입니다.’

‘일’이라는 것은 그 전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범죄하고 난 다음에 일이라는 것이 따라왔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는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 땀도 범죄한 사람에게 내려진 저주입니다. 그 다음에“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저주하신 대로, 고통도 범죄하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범죄함으로 인간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죄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 일과 수고, 땀,고통이 찾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므로 죄의 종이 된 것처럼,죄를 짓고 난 다음부터는 일의 종이 되었습니다. 죄를 짓고 난 다음부터는 땀의 종, 수고의 종 저주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일을 해야 편하고 수고를 해야 즐거워요. 땀을 흘려야 보람을 느끼지요.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뭐냐고 물으면, 더러는 놀고먹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직장을 잡지 못해서 빈둥빈둥 놀고 있으면,어른들이

“야! 이놈 자식아, 대학까지 졸업하고 아직도 직장 없이 빈둥빈둥 놀고만 있어!”라고 꾸중을 하지요. 그렇잖아도 지금 놀고먹는 것이 고통스러운데 꾸중까지 하면 그건 진짜 더 고통스럽지요.사람들은 죄를 알고 난 다음부터 수고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남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 늘 수고로운 삶을 살면서 아담을 원망했습니다.

‘아담 할아버지가 먹을 것이 없어서 그런 걸 따 먹었나? 뭐하려고 그런 걸 따 먹어 가지고 이렇게 괴롭게 하는 거야!’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다음부터 수고로운 삶이 인간에게 찾아왔으니까 그 종이 늘 아담을 원망했대요. 그래서 주인이 종의 버릇을 고쳐주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그 종을 불러서,

“내가 한 달 동안 집을 비워야 하니까, 자네가 나대신 안방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종들을 거느리고 집안일을 잘 돌보게.”하면서 모든 집안일을 그 종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볼일을 보러 갔어요. 나가기 전에 주의를 한 가지 주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네가 관할해도 되지만, 냉장고 위에 있는 상자는 절대 열어 봐선 안 된다.”

“아이구 그럼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하고는 종이 진짜 주인 행세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대청마루에 큰 대자로 낮잠도 자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종도 부리고 그렇게 일주일 동안 하니까 지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심심하니까 냉장고 위에 있는 상자가 생각나는 겁니다.

‘그 상자가 무엇이길래 열어 보지 말라고 그랬을까?’

‘그래도 열어 보지 말라고 했으니 열어 보지 말자.’

그렇게 보름이 지났어요. 그동안 궁금증이 점점 더해져갔습니다. 

‘그래 열어 보고 닫아 놓으면 주인이 알게 뭐냐.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지만…….’하고 만지작거리다가 어느 날 그 상자를 열어 보았습니다. 그 안에 편지가 있었는데,

“자네도 별 수 없구만. 가서 일이나 하게나.” 하는 문장이 씌여 있더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와 보니 그 종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사람이 그렇게 약하다는 것을 보여준 이야기이지요.

 

매여 사는 삶

 

어쨌든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일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찾아왔습니다. 범죄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엇을 해야지 먹을 것이 생겨……. 땀을 흘리고 수고를 해야 뭐라도 내 손에 잡히는 거야.’

이런 관념이 머리속에 꽉 박혔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로 무엇을 준다고 하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나님이 아무리 축복을 주신다고 해도 내가 무엇을 해야 그것을 받는 것이지…….’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고 방식은 죄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범죄한 이후부터 일에 얽매여 살고 있습니다. 이 관념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자매가 초등학생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얘야. 너 교회 나와서 예수님 믿어라.”

“아휴! 선생님 교회 다닐 시간이 어디 있어요. 학교 다녀와서 공부해야지, 피아노 학원 가야지, TV 교육 방송 봐야지…….” 

시간 계획이 꽉 짜여 있어서 예수 믿을 시간이 없대요. 애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말단 공무원이든, 좀 높은 지위에 있든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취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업소에 손님이 없는 거예요. 일을 해야 봉급도 받을 텐데 손님이 너무 없어서 괴로웠다는 거예요. 일이 많으면 일이 많아서“에이 못해 먹겠다.”며 불평하고, 일이 없으면 없는 대로 또 피곤한 거예요.이상한 것은, 사람은 일을 해도 매여 있고, 일을 하지 않아도 매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요?

일에 매였다기 보다 삶 자체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병이 들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병이 들기 전에 병에 매여서 보험에 들고, 병에 걸리면‘나아야 할 텐데.’ 하면서 병에 매여 있고, 하여튼 그 모든 일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는 더 크게 매여 있습니다.죄를 짓기 전에는‘죄를 안 지어야 되는데…….’ 그리고 죄를 짓고 난 뒤에는 가책이 되어 매이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쪽저쪽 사방팔방으로 다 매여 사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죄와 일, 죽음과 그 모든 수고에 얽매인 사람들을 거기에서 풀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서 해방을 받고 싶어 합니다. 거기서 풀어주려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주셨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더 묶여 버렸어요.

 

‘기도를 해야 하는데…….’ ‘연보를 해야 하는데…….’ ‘내가 또 안식일을 어겼구나, 내가 거짓말을 했구나.’, ‘내가 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구나.’ 그러면서 신앙으로 자기의 얽매였던 부분에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꾸 얽매이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얽매인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하시고, 그 묶여있는 모든 삶에서 풀어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일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너희는 엿새까지 일하고 제 칠일에는 쉬어라. 그리고 그날에는 불도 피우지 말라.’

불을 못 피우니까 밥을 못해 먹는 거예요.그래서 그 전날 미리 해 놔서 안식일에 그 밥을 먹고,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설거지를 하는 겁니다. 안식일 하루 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노니까 좋습니까, 안 좋습니까? 하나님이 그 안식일을 통해서 쉬라고 하셨는데,사람들에게는 안식일 자체가 일이 되어 버렸어요. 왜냐 하면, 

‘내일은 바빠서 오늘 파종을 해야 되는데…….’

‘오늘 날씨가 파종하기에 딱 좋은데 오늘은 안식일이라서…….’ 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일이 되어 버린 거예요. 요즘 학생들은,

‘내일이 시험이라 오늘 시험공부 해야 되는데, 안식일이라서 공부는 할 수 없고, 이를 어쩌지?’합니다. 놀기는 놀지만 마음은 어떻습니까? 거기에 매여서 쉬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도 하나님은‘일이 있든지 없든지 쉬어!’ 하고 안식일을 통해서 쉬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루를 쉴 것이 아니라1년을 쉬도록 했습니다. 안식년이 있어서1년부터6년까지 일하고, 제7년째에는 쉬도록 한 것입니다. 얽매였던 종이 매일 일을 하다가1년을 푹 쉬어보니까 그 안식년이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그 매여 있는 종들에게‘계속 안식년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완전한 자유 

 

몇 해 전에 물난리가 나서 한강 둑이 무너지고 아주 혼잡스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 아들이 초등학교1학년이었는데,비가 너무 많이 와서 학교에서 하루 동안 휴교령을 내렸어요. 그래서 그날 학교를 안 갔는데,

“우와! 매일 비가 왔으면 좋겠다.”

그러더라고요. 매여 있는 사람에게는 쉬는 날이 너무너무 좋은 것이듯이 묶여 있는 종들에게 있어서 안식년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1년을 쉬다가12월20일쯤 되면, ‘내년부터 또 일해야겠구나.’하고 일에 매이게 되니까, ‘안식년이 좀 길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식년이 일곱 번째 되는 그 안식년 다음해는‘희년’이라 해서 완전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종이 아니에요.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 겁니다. 묶여 있던 땅들이 풀려서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고, 묶였던 종들이 풀려서 자유를 얻어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는 완전한 자유가 선포되는 해가 희년입니다. 안식일은 하루만 쉬니까 있으나마나 하고, 안식년도1년만 쉬니까 감질나고, 희년은 모든 것에서 해방을 받고 완전한 자유를 누리니까 참 좋은 것입니다. 모든 매여 있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그 희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2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셔서

“내 아버지께서 일을 하시니 나도 지금 일한다.”라고 하시면서 일을 하셨습니다. 그 분이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 분은 할 일이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일을 하신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시면서 수고하신 것입니다. 그 분은 바로 희년이시기 때문에, 일에 매여 있는 우리를 위하여 대신 수고하시고 우리를 쉬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땀을 흘리셨습니다.그가 어느 날 기도하시면서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신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그 분이 왜 땀을 흘리셨습니까? 그 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신데 땀 흘려 일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땀 흘리는 고통에 매여 있는 우리의 삶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땀을 흘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돋아난 가시가 우리의 옆구리를 찔러서 우리가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찔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 분은 희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모든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저주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대신 받으셨습니다.

희년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임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시고 땀을 흘리시고 가시에 찔리시고 목마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아하!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시는구나. 내가 흘려야 할 땀을 예수님이 흘리시는구나. 내가 겪어야 할 그 고통의 가시를 예수님이 받으셨구나.’ 하고 희년이 옴으로써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그 자체로 우리 마음에 해방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원주에서 조금 떨어진 간현이라는 곳으로 유격 훈련을 받으러 간 적이 있습니다. 모포 두 장, 신발 두 켤레, 반합,내의, 양말을 넣어 짊어지고 소총 들고, 군화 신고 완전 군장을 하고 갔습니다. 원래 잘 안 걷던 사람이라 한10킬로미터를 걸으니까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어요. 군장도 무겁고 총도 무거운데 물집 때문에 똑바로 걷지를 못하겠더라구요.

‘이렇게 해 가지고 유격훈련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안되겠다.’해서 바늘을 구해 가지고 물집을 터트렸는데, 물이 다 빠지고 나니까 그 껍데기가 발바닥에 착 달라붙더라구요.

‘옳거니, 이렇게 착 달라붙어서 하루만 지나면 아물겠다.’고 기대했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집합할 때 뛰어나가니까 그 껍질이 벗겨져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발을 붙였다가 뗄 때마다 아픈 거예요. 그날10킬로미터 구보를 한다는데, 출발하기 전에 환자가 있으면 나오라고 하길래 나갔더니 물집 생긴 것은 환자가 아니래요. 그래서10킬로미터를 뛰는데 뛸 수가 없잖아요. 다리가 아픈데다가 총과 군장도 무거우니까 도저히 못 뛰겠더라고요. 군대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낙오되면 그 전체가 불합격입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전우들이

“김 일병 총 이리 줘. 군장 줘. 철모 줘.”

하면서 하나씩 가져갔습니다. 빈 몸인데도 비실비실 하니까 뒤에서 떠밀어줘서 겨우10킬로미터 구보를 다 끝냈습니다. 그때 대신 총을 들어주고, 철모를 들어주고, 군장을 들어주고 하니까 굉장히 가볍더라고요.

여러분! 다른 사람들이 내 짐을 다 가져가니까 굉장히 홀가분하고 자유롭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날 굉장히 가볍게 구보를 할 수 있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하물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내 죄를 짊어지고 가셨는데, 내가 왜 무겁습니까? 내가 왜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내 모든 수고를 대신하셨는데, 내가 수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내 대신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 내가 저주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에 매여 있는 사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8장에 간음한 여자가 나옵니다. 성경에는‘간음한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는데,이 간음한 여자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이 여자는 죄의 사슬에 꽉 매여서 오도 가도 못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다만 남아 있는 일이라면 저주가 그 머리 위에 내려져서 돌에 맞아 죽는 일 뿐이었습니다. 죄에 꽁꽁 묶여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여자가 예수님 앞으로 왔습니다. 예수님이 누굽니까? 희년입니다. 그 간음한 여자가 희년인 예수님 앞으로 오게 되자, 꽁꽁 묶였던 죄의 사슬에서 해방을 받아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8장에 보면,그 여자를 꽁꽁 묶었던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왔다가는 전부 도망가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죄에서 풀어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이사야53장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   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의 과거를 엮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비뚤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멋대로 살았다는 것이죠. ‘우리는 다 양 같아서‘ 했으니까,우리 대신에 나를 집어넣어 생각해 봅시다.

‘김동성은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예, 저도 하나님의 말씀처럼, 내 생각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만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올바른 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수고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빗나간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그가 누구입니까? 조금만 생각해 보시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이사야53장을 읽어보면, ‘그’라는 말이25번이나 나옵니다. 이사야53장은 그가 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 나타난 그는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하나님께서는 김동성의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셨도다.’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릇된 길에서 무거운 죄의 짐을 짊어지고 세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마치 철모, 소총, 군장……이런 것들처럼, 무거운 짐이 내 온 몸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내 짐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짐을 예수님이 대신 지신 바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으므로 나의 행위를 보지 아니하시고, 나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더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왜 제가 희년에 대한 말씀을 전하는 줄 아십니까? 예수님이 죄짐만 짊어지신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수고도, 내가 겪어야 할 고통도, 내가 흘려야 할 땀조차도 모두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의 삯인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예수님이 그 죽음조차도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뿐만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파생되어진 모든 일과 수고와 땀과 가시와 저주와 죽음을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해서 해방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두 짊어지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함을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 제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는데요. 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시고 우리를 쉬게 하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만나자

 

레위기25장8, 9절에,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얽매여 있는 종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전에, 죄로 인해 파생되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수고와 땀과 일과 모든 얽매였던 것에서 풀어주려면, 죄에 대한 진정한 대가가 지불되어 죄가 씻겨져야 다시 원상태로 회복이 됩니다. 그래서 희년을 한 해 앞두고 마지막 일곱 번째 안식년이 되는7월10일에 대속죄일을 정해 놓고,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씻는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모든 백성이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국적으로 나팔을 붑니다.

 

50년째 희년이 오면 그냥 자유를 주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얽매여 있던 모든 종들에게 진정한 자유가 되도록 희년이 되기 바로 전해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대속죄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죄 때문에 얽매였던 삶과 종이 됨으로 말미암아 해야 했던 일에서 풀려나려면 죄가 씻겨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7월10일에 대속죄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염소를 잡아 하나님의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피를 뿌리고 단뿔에 피를 바르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씻는 속죄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날은 전부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 죄 용서함을 받은 날이니까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곱 번째 안식년, 대속죄일에 속죄제사가 다 끝난 다음에 나팔 소리가“뚜--.”하고 나면,

“내가 하나님 앞에 범했던 그 모든 죄들이 다 씻겨졌구나. 이제 희년이 찾아왔다는 소리구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구나.”라는 소리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를 공포하기 전에 먼저 속죄 제사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조건 쉬라고 하시지 않고 진정한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그 모든 것들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해결하시고 난 다음에 

“이제 끝났다. 이제 너는 쉬어라. 너는 자유롭다.” 하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내 모든 죄가 해결되었구나.’ 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죄를 사하시고,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문제 앞에서 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여러분이 희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의인이 된 이후에 병이 들었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쉴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 찾아온다고 해도 죽음이 두렵지 않고, 죽음 앞에서도 여러분은 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것에서 풀어주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희년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주려 하심”<히2:15>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슬픔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병든다는 것도 슬픈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모든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에서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에 묶여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죄를 해결하려고 회개하는 데서 풀어주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이 지긋지긋한 육신 덩어리 속에 갇혀 있으면서 고통스러웠는데, 이제 이 육신의 몸을 벗는구나.’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황홀한 것입니다.옛날에 어떤 가장이 죽게 되어서 가족을 다불러 놓고 부인의 손을 잡으면서,

“이 한 많은 세상에 당신 혼자 두고 내가 먼저 아버지 나라에 가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오. 그러나 내일 아침에 우리 다시 만납시다.”

큰아들의 손을 잡고서도,

“미안하다. 내가 너희들을 두고 아버지의 나라에 먼저 가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또, 둘째 아들을 불러 놓고,

“하늘나라에서 만나자.” 하고 유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의 손을 잡고는 엉엉 울면서,

“나는 이제 너를 못 만나겠구나. 너는 구원을 못 받았으니까.” 하면서 죽었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모시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죽음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을 볼 때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볼 때 가슴이 아픈 것은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는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묶여 있었던 것에서 풀어주실 때에는 속죄제사를 통해서‘너희 죄가 모두 다 씻겨졌다.’는 소리를 전국에 알리기 위해 나팔을 불게 하셨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종들이,

‘우리가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 해방이 되었구나. 아버지가 주신 기업으로 돌아가겠구나.’하고 즐거움에 사로잡힐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찾아온 희년

 

제 생애 속에서도 희년이 찾아왔습니다.그것은1975년이었습니다. 사람마다 다 희년이 다른가 봅니다. 그 전에는 늘 매여 있었는데, 희년이 찾아온 이후, 계속 자유함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희년은 저를 일에서, 땀에서, 고통에서 풀어주었습니다. 지금 설교하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이 아니라 좋아서 하는 겁니다. 여러분 한낮에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축구를 하는 것은 일입니까? 그것은 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얻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좋아서 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이 왜 교단에 매여야 됩니까? 왜 형식에 매여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얽어매려고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얽어맨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풀어주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묶여 있다면, 그 사람은 해방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정말 죄에 대하여 해방을 받았습니까?여러분의 마음에 죄가 다 씻겨졌습니까? 희년이 찾아와서 자유함을 누린다고 하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서‘그럼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되겠네.’ 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죄에서 자유함을 입고 나면, 그 주님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자로 있다가, 엘리사 앞에 와서 말씀을 듣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을 하고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 전에는 마음이 얼마나 뻣뻣하고 교만했는지 아십니까? 그러나 그 병이 깨끗하게 나으니까 얼마나 마음이 낮아졌는지 모든 예물들을 엘리사 앞으로 가지고 와서

“이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했단 말입니다. 나아만의 마음에,

‘아까운데 반만 줄까? 그래도 다 주어야지. 문둥병을 고쳐 주었는데…….’ 하는 마음으로“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한평생 자기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그 문둥병, 한평생 얽매였던 그 문둥병에서 자유함을 주신 것이 감사해서 마음으로부터“종에게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법이 아니라 은혜로 거룩하게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면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도를 순종하고, 성령의 법을 따르며, 주의 길을 걷게 됨으로 인해 오히려 전보다 더 거룩한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흑인 노예들은 한평생 종으로 살았습니다.도망갈까 봐 쇠사슬에 묶어 놓기 때문에 한평생 종노릇을 하며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런데 흑인 노예 사회 속에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아주 깊숙이 들어가서 많은 흑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쇠사슬에 묶여서 일평생 종노릇을 하며 비참하게 살아야 했던 그들이 주님의 보혈로 죄를 씻음 받고, 자유함을 입고 하나님 앞에 부르는 찬송이 있었습니다.

“오- 오- 자유, 오- 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 비록 얽매였으나 나는 이제 돌아가리. 자유주시는 내 주님께.”

그들은 곡괭이로 땅을 파면서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육신은 비록 얽매였지만, 하나님께서 죄로 묶여 있었던 그들에게 완전한 해방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은 묶여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그 마음은 죄에서 해방되어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게 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흑인들처럼 육신이 쇠사슬에 묶이지도 않았지만, 마음이 죄에 묶여 늘 죄인입니다. 여러분,희년이 와도 묶여 있던 종들을 풀어주는 권세가 있는데, 하물며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지 못하겠습니까?

 

구약 성경 다니엘9장24절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續)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이것은 메시아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 분이 이 세상에 임하시므로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죄악이 영원이 속하게(永續)되며,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 그래서 희년은 모든 얽매인 종들을 풀어주는 해인 것입니다.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레25:10-12>

이 말씀을 보니까,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것이 왔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이 옴으로 죄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모든 죄에서 풀어줌으로 자유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있는 말씀처럼, 주님이 이 세상에 임하므로, 거룩한 분이 이 세상에 임하므로, 우리도 그 분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모든 희년의 이야기를 종합해 봅시다. 49년 다음50년째가 희년인데, 내가 지금45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 45년. 4년만 지나면 일곱 번째 안식년이 오는구나. 일곱 번째 안식년. 7월10일 대속죄 제사를 드리고 조금 있다가 나팔소리가 나겠지? 그러면 이제 완전한 자유가 오겠구나.’

얽매인 종은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희년을 기다릴 것입니다.

‘이제3년 남았구나.’, ‘아,이제2년 남았구나.’, ‘내년이 마지막 안식년이구나.’

그것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희년이 오면, “아, 자유다!” 하면서 괭이와 삽을 다 던져 버리고 자기 고향,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임하므로 본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 그 안식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죄에서 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누구를 미워했습니다. 이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시는 분에게는 희년이 왔습니까, 안 왔습니까?희년이 오지 않았습니다. 희년을 맞이했다는 사람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1948년에 어떤 청년이 등산을 갔습니다. 너무 깊이 들어가서 해가 져 버렸어요.텐트를 치고 잘 수도 없어서 어둑어둑할 무렵에 마을을 하나 찾았는데, 그 마을 입구에 일장기가 걸려 있는 거예요. 그래서‘무슨 동네가 이런 동네가 다 있나? 태극기가 붙어야 되는데 일장기가 붙어 있네?’ 하면서 마을에 들어가니까, 일본 천황 동상 앞에서 몇몇 아주머니들이 절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주머니,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아이고, 이렇게 일장기를 걸어 놓고 절을 하지 않으면 일본 순사들한테 혼나요!”

“지금 무슨 소리 합니까? 해방된 지3년이 지났는데요.”

그래서 일장기도 뜯어내고, 동상도 부순 일화가 있습니다. 해방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일장기 걸어 놓고, 일본 천황 동상 앞에 절하면서“안 하면 혼나요.” 하는 사람을 보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에! 해방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러고 있어’ 하는 마음이 안 들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이후,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씻어 놓으셨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 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죄를 씻어달라고 하는 사람을 보면, ‘저게 아닌데,저 사람은 아직까지도 죄에 묶여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도 내 말을 안 받아들이니까 참 고통스럽더라고요. 불쌍해서 고통스러운 거지요.

 

그러나 오늘 여러분은 대속죄 제사가 끝났다는 나팔소리를 들으셨을 줄 압니다. 그게 다른 소리가 아니고, 여러분을 모든 죄에서 풀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있지만, 삶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성실하게 직장 생활을 하지만, 거기에 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매이는 것입니다.

이 희년이 임하므로, 그 사람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희년 자체가 거룩한 거예요. 희년 전의 삶은 수고하고 고통스럽고 무거운 삶이었지만, 희년 이후의 삶은 너무너무 편하고 자유로운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삶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통하여 경험하게 하시면서, ‘아하, 예수님이 오시고 난 다음의 삶이 바로 이 희년 후에 오는 삶이구나.’ 하고 희년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설명해 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희년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어찌 여러분을 모든 죄에서부터 풀어주지 못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능히 우리를 죽음에서,병과 환란에서 풀어주시고,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도록 해 주시는 분입니다. 찬송가를 보면, 소경이 작시한 가사가 있습니다. 오른쪽 팔이 잘려 나간 사람이 작시한 가사도 있습니다. 그들은 불구자이면서도 불구자라는 것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큰 기쁨 속에 충만하게 젖어서 주님을 찬양하는 찬송시를 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도 병에서도 죽음에서도 가난에서도 풀어주시고, 모든 것에서 풀어주시는 진정한 구원자입니다.

 

반대로, 마귀는 얽어매는 일을 합니다.

“너 조금 전에 죄를 지었지? 그리스도인이 그래도 되는 거야?”

“안되지.”

“그런데 왜 죄를 지었어?”

이렇게 죄에 꽁꽁 묶여 있다면, 그것은 죄에서 해방된 사람이 아닙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마르틴 루터가 잠을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마귀가 발끝에 나타난 거예요.

“마르틴 루터, 너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런 이런 행동을 했잖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런 일을 해도 되는 거야?“ 하면서 마귀가 삿대질을 하더래요.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하품을“아-함!” 하면서 자 버렸대요. 무엇을 의미하는 일화인지 아십니까?

저는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에‘죄를 안 지어야지.’ 하고 결심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같이 지내다 보니까 저절로 죄와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고 각오도 하지 않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보니까 자연스럽게 죄와 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닮으려고 애를 써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꾸 따라다니다 보니까 그 분을 닮아 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다니는 삶을 살게 하시면서, 우리를 모든 죄에서 풀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정결케 하십니다.

 

자!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한번 기도원에 가서 회개, 자복,통회 기도하고 집에 돌아가면 삼일 정도는 죄가 씻겨진 것 같다가도, 불쑥불쑥 죄가 나타나면 또 기도원에 가서 충전하는 식으로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희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희년과 자유는 영원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셨다면,

‘아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씻어 놓으셨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구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구나.’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모든 죄에서 우리를 풀어주셨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희년이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