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라기 성경 공부/ 말1 20210512
<말라기 성경 공부를 시작하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교회의 두 형상을 경험케 하셨다.
하나는 내게 복음을 전해 주고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으로 이끌어 가는 은혜롭고 감사한 세계이다.
또 하나는 교회 안에 인위적인 체제의 세력이다.
후자인 인위적 체제는 전자의 형상을 실현해 내는 통로라고 여기고 나는 그 세력과 27년을 지냈다.
(여기서 '인위적'이라는 표현은 롬7:5, 약3:13-16에 설명된 육신적, 정욕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물론 당시는 인위적이라고 여기지 않고 성령의 이끌림으로 여겼다.
나 역시 그 인위적인 체제에 속해 있었고 그 중심 세력과 함께하는 것이 신앙의 방향으로 삼았다.
성경이 제시한 분별로는 내가 경험한 전자인 하나님의 형상은 귀하고 아름답지만, 후자인 체제는 '아무 것도 아니어야'(고전3:7) 한다. 그리하여야 전자의 형상이 보존될 수 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책망을 듣는 교회에 하나님의 촛대가 보존될 수 있는 것처럼,
말라기에 기록된 제사장과 백성의 죄에 대한 엄중한 하나님의 책망과 경고가 나를 포함한 함께하는 모든 이에게 큰 울림이 되길 바라며 이번 말라기 성경 공부를 시작한다.
말라기 성경 공부/ 말2 20210516
<똥을 똥으로 여기지 못한 제사장>
광야 생활 40년 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변을 통할 때에 삽을 들고 밖에 나가서 땅을 파고 배설물을 덮어 처리하였다. (신 23:13) 이 더러움을 처리하는 방법은 죽은 육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무덤은 더러운 것을 묻어 놓은 곳이고, 묘비는 더러운 것을 묻어 놓았다는 표시이다.
똥 보다, 썩는 시체 보다 더 더러운 세계가 있다.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여기지 못하고 그것을 품고 사는 인생의 마음이다.(렘17:9, 롬3:13)
"회칠한 무덤 같으니!"라는 예수님의 외침은 더러운 것을 더러움으로 여기지 못하고 도리어 아름답게 꾸미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지적한다.(마23:27)
"평토장한 무덤"도 더러움을 없는 것처럼 여기고 감추는 자를 지적하는 말씀이다.(눅11:44)
똥을 더럽게 여기는 분별은 깨끗함을 사모하고, 더러움을 씻고자 하는 마음과 함께한다.
그러나 똥을 품는 마음은 똥과 함께 망할 마음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저주를 저주로 여기지 않는 제사장의 얼굴에 하나님은 똥을 바르시고 그를 저주하셨다.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말2:3)
그리스도인이 육체의 더러움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삶의 능력이 되고 방법이 되겠는가?
속죄제 희생의 똥이 진 밖에 불살라짐(출29:14)과 같이 예수님도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히13:12)
똥 취급을 받은 예수의 능욕은 우리가 받아야 할 능욕이었다.
말라기 성경 공부/ 말3 20210519
<온전한 십일조>
포도원을 농부에게 세(稅)로 준 주인은 결실의 때에 종들을 보내어 열매를 받으려 했으나, 농부는 주인의 종들을 때리고 돌로 치고 심지어 주인의 아들도 포도원 밖에 내어좇아 죽였다(마21:33-46)
이 예수님의 비유는 말라기 3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것,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강도질)'한 사람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내용이다.
주인은 농부에게서 '공경'을 바랬으나 농부의 '계산'은 포도원을 강탈하려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쪽으로 흘러갔다.
세(稅)는 법의 영역이고, '공경'은 마음의 영역이다.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9:31,32)
열 명의 문둥이가 예수의 지시를 따라 제사장에게로 가는 도중 나음을 입었다.
열 명 중 한 문둥이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께 돌아왔다.
아홉은 문둥병은 처리되었지만 하나님 안으로 이끌림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마리아 문둥이는 자신의 인생 모든 것을 위해 준비된 세계로 이끌림을 받았다.
자기를 스스로 섬기는 계산에 익숙한 인생이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마리아 문둥이처럼 문둥병을 처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과 그 약속의 문(門)인 예수 그리스도를 얻은 자는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
깊고 어두운 구덩이에서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구한 다윗은(시57:) 결국 온 땅 위의 하나님과 그 영광에 함께한다.
이렇게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감사한 마음을 드린다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삶이 아닌가?
말라기 성경 공부/ 말4 20210523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 크고 두려운 날>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크고 두려운, 극렬한 풀무불과 같은 저주의 터널을 통과한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싸개는 그 피할 수 없었던, 죄로 말미암은 저주와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외양간의 송아지가 어미의 고통이나 탄생의 비밀을 다 알 수 없는 것처럼,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그 크고 두려운 날의 비밀을 다 알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모세에게 명한 하나님의 법도와 선지자(눅16:31, 눅24:27, 요1:45, 행28:23)를 통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아비의 마음과 자녀의 마음이 연결되듯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어 누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