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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반 성경 공부 노트

7. 안식과 하나님 나라

<영원한 안식>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2:1-3]

 

하나님의 모든 일의 완성은 '영원한 안식'에 있다.

안식은 일을 다 이루었을 때, 일을 다 마치었을 때 얻는 결과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사역의 완성과 끝났음을 분명히 하시면서 안식의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이 안식을 누리는 곳이 '하나님 나라'이고, 이 안식을 누리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겠는가?

 

<잃어버린 안식>

 

성경은 첫 사람 아담이 잃어버린 안식1) 을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2) 하여 주신 일을 증거하고 있다.

 

아담의 불순종은 이 세상으로 하여금 안식 없는 곳이 되게 하였다.

사람들은 안식이 없는 곳에서 안식을 구하고, 안식할 수 없는 방법으로 안식을 누리려는 수고와 고통의 현장에 갇혀 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 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시107:10-12]

 

고된 수고는 탄식을 낳고 수고와 탄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수고는 더 무거운 수고와 더 깊은 탄식과 공허를 낳는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3)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명하여 주기 위한 잠시 세계이다.

첫째 아담 안의 모든 수고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따라 가는 결과이다.

註1)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17]

2)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1:3]

 

 

 

<회복>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회개(悔改)는 회전(回轉)의 동작과 함께 한다.

 

마태복음 11장에서 회개치 아니하는 고을,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을 예수께서 저주하셨다.1)

그리고 "내게로 오라!"는 말씀으로 이들의 지혜와 슬기가 아닌 다른 안식의 방향을 제시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좇은 결과가 안식을 잃은 것이면, 안식을 회복하는 방향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 방향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에서 돌이켜야만 한다.

돌이킨 방향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세계가 준비되어 있다.

 

예수께로 가는 일은 예수의 멍에를 함께 메는 일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6:3-5]

 

예수와 멍에를 함께 메는 일은 예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에 함께하는 일이고 안식에 참여하는 일이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4:10]

 

몸이 피곤할 때 침대가 안식처가 될 수 있고, 빚쟁이에게 탕감이 안식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죄인에게는 십자가 그늘이 안식처가 된다.

 

1)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태복음11:21]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세계를 비웃는 자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자신의 성을 쌓는 자들에게 '말세(末世)'는 불편한 진실이다.

 

노아 때 물의 넘침으로 세상이 멸망한 것처럼 이번 세상은 불사름으로 역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결정인데, '불사름'이라는 물리적 현상이 나타나기 전에 '말세'의 심판이 경험된 자들이 있다.

이들은 세상 죄를 없이 하려고 '세상 끝'1) 에 오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이다.

 

아담 안의 수천 년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하루에 담겨 심판이 이루어졌고,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세계가 그의 부활과 함께 열렸다.

 

땅을 의지하던 모든 것들이 홍수에 엄몰되고 방주를 의지한 노아와 일곱 가족이 생명을 얻은 것처럼 세상을 의지하던 우리는 십자가 예수와 함께 죽었고 그의 부활과 함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렸다.

 

마음에 말세가 경험된 자들은 장차 망할 땅 위에 더 이상 '자기 城'을 쌓을 수 없다.

성(城)이 아니라 선(船)을 짓는 노아처럼 방주되신 예수와 함께하는 안식의 삶을 산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3:12-13]

 

온 천지를 덮는 홍수의 격노가 임하기 전에 노아의 마음에 말씀의 심판이 임하였고 이 노아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은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 놓으셨다.

1)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 9:26]

<신의 성품>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1:4]

 

아들에게 아버지의 성품이 유전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고, 그리스도의 성품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 성품의 내용은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그리고 사랑이다.

 

이 아름다운 성품은 아버지를 자세히 앎으로 아들의 마음에 저절로 맺히는 열매1) 이다.

 

예수를 앎으로 얻은 보배로운 믿음은 하나님과 그 자녀들의 관계의 시작이고 아버지의 모든 능력과 성품을 공급받아 누릴 수 있는 근거이다.

 

아버지의 성품은 아들에게 저절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버지의 성품을 나타내려고 노력하는 자는 아들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택함을 받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1)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한복음 15:4]

 

 

<세상의 소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태복음 5:13]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은 이 땅에 머리 둘 곳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에 용해되어 자신의 근본이 깨닫게 된 자의 마음이다.

 

이 마음을 가진 제자에게 예수께서 “너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된 천국 복음은 예수의 음성을 왕의 음성으로 듣고, 배워 알게 되고, 누리는 자를 위한 세계이다.

 

소금이 사람의 입에서 타액에 의해 용해되면서 짠 맛이 생겨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용해되어 말씀 속에서 발견된 자신을 알게 된다면 비로소 짠 맛을 내는 예수의 제자이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맛을 내는 자이다.

 

짠 맛을 내면 그는 소금이다.

이 짠 맛은 하나님의 미각에 의하여 결정되며,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기뻐 받으시는 맛이다.

 

하나님의 받으시는 것은 소금이 되려고 노력하는, 짠 맛을 내려는 인위적인 수고가 아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복종된 반응이다.

 

사마리아 수가 마을의 여인*[요4:]은 예수의 음성을 들으면서 비로소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고, 이전에 없었던 '맛'을 나타내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요4:29]

 

예수의 말씀에 자신의 전부가 비추어 졌고,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이의 엄위는 여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었다.

 

예수께서도 자신을 영접한 여인의 마음을 받으시고1) 마을 사람들은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 앞으로 인도되었다.

이 여인에게서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을 읽어 낼 수 있다.

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4:31-34]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나는 하나님을 소유하였는가? 하나님의 소유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택한 족속인가?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인가? 

 

각도로 새겨 만든 금송아지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의하여 만들어진 하나님인 것처럼,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만들어지는 하나님이 있다.

금송아지는 백성들이 택한 하나님이고 백성이 소유한 하나님이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모습으로 예수 앞에 나왔으나 예수께서는 그를 "하나님 나라를 본 적이 없는 자"로 여기셨다.

거듭남은 어두움의 세계에서 빛의 나라에 옮겨짐을 의미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어두움은 하나님을 잃은, 하나님 없는 세계이다.

 

바울은 이 어두움에서 눈을 뜨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신을 볼 수 있었다. 1)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엡5:8]

"너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 [엡5:14]

 

빛의 자녀들의 원적(原籍)은 어두움이다.

이 어두움의 터널에서 나온 자들이 빛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인이다.

 

창세기 47장의 바로가 꾼 꿈인 7년 풍년, 7년 흉년은 모든 인생의 결과와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돈, 짐승, 전지(田地)가 생명을 보존하여 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물질에 목숨을 걸고 사는 인생은 어두움에 속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은 하나님의 모든 소유를 누리며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을 잃은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그것에 매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1)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도행전 9:15]

 

 

<헵시바와 쁄라>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사야 62:1-5]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 "결혼한 여자"라는 뜻의 이름인 '헵시바와 쁄라'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백성의 별칭(別稱)이다.

 

헵시바와 쁄라의 본래 호칭은 "버리운 자", "황무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온의 공의와 예루살렘의 구원을 밝히 나타내시고 성취하신 결과, 그 영광의 광채는 아름다운 면류관과 왕관으로 나타났고 그 은총을 입은 자를 '헵시바, 쁄라'로 불러 주신다.

 

헵시바와 쁄라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나는 그 분과 결혼하였다"는 사실을 누리라고 주신 이름이다.

 

하나님이 주신 곡식을 '오직 추수한 자'가 먹고 그 식물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처럼1), 헵시바와 쁄라는 그 구원의 이름을 누리는 자의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희롱하는 능욕의 세력을 잠잠히 받아 주시고 이들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십자가에서 이루셨다.

 

이 가시 면류관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면류관이 되었고 시온에 세운 왕2) 의 왕관이 되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살전2:19]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3:11]

1) 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에게 식물로 주지 아니하겠고 너의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인으로 마시지 않게 할 것인즉 

오직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나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요 거둔 자가 그것을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62:8-9]

2)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시편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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