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 성경 공부/ 욘1 20210613
<깊이 잠이 든지라>
요나서는 앞뒤 하나님의 묵시를 전하는 선지자들의 모습과는 다르게, 말씀에 대하여 거치는 반응을 보이는 선지자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니느웨 사람들의 구원보다도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과 요나의 마음이 충돌하는 부분이 요나서 내용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스스로 자신을 ‘히브리 사람’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밝히고 있지만, 지금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거슬리는 방향을 가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다면 그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세력에 이끌리는 마음은 아니다.
요나의 마음에 형성된 어떤 세력이 하나님께 이끌리는 힘을 잠재워 버렸다.
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하는 세력에 대한 분별을 얻어내는 일이 곧 요나로 하여금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리라.
수요 성경 공부/ 욘2 20210616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
니느웨를 거절한 요나의 도착지는 물고기 뱃속이었다.
요나는 이 스올의 뱃속(지옥의 뱃속 belly of hell)에서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들의 배은(背恩)을 지적하면서 자신은 감사하는 목소리로 서원(誓願)을 갚겠다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이 요나를 니느웨 땅을 밟게 하시고 전도하게 하시지만, 요나서 4장의 요나는 1장의 요나처럼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과 결이 다른 모습에 머물러 있다.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은 요나의 기도와 회개 속의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요나 자신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남인가?
'거짓되고 헛된 세력'이 활동하는 장소는 모든 인생의 마음이 아닌가?
이미 1장에서 보여준 '히브리인 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자', 그리고니느웨 사람의 구원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선지자요나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요 성경 공부/ 욘3 20210620
<재에 앉으니라>
'영생(永生)'과 '잠시(暫時)'의 영역이 있다.
잠시는 '있다가 없어지는 세계'이므로 허상(虛像)이다.
영생은 잠시의 연장이 아니라 허상에서 실상으로의 도약(跳躍)이다.
이 도약은 마치 안데르센 동화 속의 미운 오리 새끼가 자신이 백조인 사실을 알게 되는 것 같이 잠시에서 영생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거듭나는’ 세계이다.
그러니까 영생을 누린다는 의미는 잠시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뜻이 된다.
'재'는 소멸의 결과물(벧후3:7)이고 잠시 세상의 결과이다.
'재에 앉는다'는 의미에서 '사망이 임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니느웨 왕이 왕좌에서 내려와 재에 앉은 것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의 소문을 듣고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의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잠시 영역의 끝에 선 자,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소망을 바랄 수 없게 된 자,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은 자는 영생의 문턱에 도달한 자이다.
니느웨 왕은 단지 '소문을 듣고' 그 마음에 '사망'이 임하였다.
요나가 겪는 물리적인 상황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듣고 믿는' 세계는 하나님의 택하신 구원에 이르는 방법, 영혼을 이끄는 말씀의 세계이다.
성서는 영생을 얻게 하는 책이다.(요5:39)
잠시에서 영원으로 옮겨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잠시라는 허상에 속해있는 자신을 발견한 자,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은 자에게 영생이 준비되어 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10:37)
수요 성경 공부/ 욘4 20210623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박 넝쿨>
이 박 넝쿨은 요나와 우리 모든 인생의 형상이기도 하다. (벧전1:24)
이 풀과 같은 자기 형상이 보이지 않는 자가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역은 이 풀과 같은 인생을 사랑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4)
'자기 발견' 없는 '자기 부인'이 있을 수 없고, '자기 부인' 없는 '자기 십자가'는 가짜다.
니느웨 사람들의 구원을 싫어하는 요나에게서 숙주를 공격하는 기생충과 같은 체질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은 이 체질의 소유자들, 가인(창4:5), 요셉의 형들(창37:20), 르우벤(창49:4), 다윗(삼하6:8), 압살롬(삼하16:22)을 통하여 부패한 자식의 형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경은 이 깊은 어두움의 상황이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기 위한 전야(前夜)인 것도 증거하고 있다,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박 넝쿨보다 못한, 부패하여 더럽고 가련한 자기의 모습을 잊은 요나를 흔들어 깨우시는 이야기가 '요나서'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