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복음반 성경 공부 노트
4. 아브라함과 믿음
<믿는 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과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믿는 자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3]
믿음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구원의 근거이고 구원의 삶을 누리게 하는 힘이다.1)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2:3]
이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과 보지 않은 사실이 믿어진 열매이다.
믿음의 사람은 본 것을 의지하는 자2) 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따르는, 의지의 축이 옮겨진 자이다.
註1)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8]
2)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골로새서 2:18]
<아브라함을 부르심>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12:1-2]
하나님께서는 자식이 없는 칠십 오 세의 아브람을 택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배경으로 삼으셨다.
성경은 '죽은 자와 방불한' 자를 택하였고, 그의 출처를 '우묵한 구덩이'로, '혈혈단신'의 상황으로 기록하고 있다.1)
그리고 아브라함의 모든 근거인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을 하신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의 말씀을 더 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요약하면 "떠나라"와 "되리라"이다.
"떠나라" 안에 "지시할 땅"이 있고 "되리라"가 함께 한다.
만일 떠나지 않는다면 아브람은 더 이상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
떠날 수 있는 힘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만일 떠날 수 있으면 그 다음은 모두 하나님의 준비한 세계, '여호와이레'이다.2)
"본토, 친척, 아비 집"은 아브람의 세계이고, 인간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이고, 인간적인 것과 하나님의 것이 혼잡 되어 있는 곳이고, 하나님께서 거절한 육체의 세계이다.3)
이 사실이 인정되고 믿어진 자의 믿음은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다. 은혜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은 이 땅의 모든 인생에게 이미 주어진 세계이고 모든 육체가 의지하는 세계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 영역을 떠났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의 시작이고 과정이고 결과가 되었다.
註1)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1:12]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 [이사야 51:1,2]
2)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세기 22:14]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창세기 6:3]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15:5,6]
아브람의 마음에 자리 잡은 자신의 상속자는 엘리에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의 마음에 받아드리기에 어려운 후사에 관한 계획을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아브람은 흘러가던 생각의 방향을 달리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자신의 익숙하고 헤아릴만한 세계에서, 다 헤아릴 수 없지만, 하나님이 제시한 세계로 방향을 달리하는 아브람의 마음을 하나님은 보셨다.
성경은 이 상황을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었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이 믿음은 '본토, 친척, 아비 집'에 익숙한 흐름에서 방향을 달리하는 마음에 형성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믿음의 원어 '아만'이 이사야 30장 21절에서는 '오른편 길을 취하다'는 의미로 기록되어 있다.
이 믿음의 삶은 자기 생각에 익숙한 삶의 방향에서 역주행하여 하나님이 준비한 세계에 몸과 마음을 던지는 삶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믿음은 분량이 아니라 대상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사람의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뢰와 그를 구하고 의지하고 누리는 활동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히11:6]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율례와 법도에 이끌린 아브라함1) 에게 하나님과의 계약이 성취되고 복을 누리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註1)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26:5]
<할례>
구십 구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고, 이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웃었다.
이 웃음은 기쁨과 감사의 표현이 아니라 실소(失笑)이다. 실소는 다소 황당하여 저도 모르게 툭 터져 나온 웃음이다.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창세기 17:17]
아브라함의 마음에 이미 자리 잡은 기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결정과 충돌한다.
이 충돌의 현장에서 명하신 하나님의 규례가 '할례'이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렘4:4]
"마음 가죽을 베고"
할례는 마음에 새기는 분별의 표시이다.
할례의 표시는 결코 명예로운 훈장이나 계급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표시이다.
그리고 할례는 사람의 경험된 생각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일종의 도약(跳躍)이고, 할례 된 마음은 '믿음의 삶'의 한 형태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빌3:3]
하나님께서 구십 구세가 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창17:1]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는가?
할례는 완전에 참여하는 통로이다.
자신의 삶의 축(軸)이 자신인 사람이, 이 축을 떠나 하나님의 축으로 옮져진 삶을 산다면 하나님의 완전함을 누리는 자가 아닌가?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