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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면류관

Digital graphics,

55.1cm x 36.3cm, 300 ppi,

201

4-7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이야기

 

 

가시 면류관

 

 

씨름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을 한다. <창32:24>

씨름은 중심 무너뜨리기 경기이다.

야곱의 중심은 견고하였다.

하나님은 야곱의 중심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야곱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요구는 ‘복(福)’을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야곱에게 줄 복이 없다.

왜냐하면 이미 다 주었기 때문이다. <창27:27-29, 28:13-15>

 

하나님이 야곱에게 허락한 축복은 ‘약속’의 형태로 주어졌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허락한 동일한 약속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의 모든 자에게 허락된 축복이다. 이 축복의 세계는 완전한 세계이고,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누리는 세계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이 지어진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의 마음에 믿음의 세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듣는 자의 마음에 자기중심적인 기준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과 서로 충동을 일으킨다.

듣긴 들어도 하나님과 믿음으로 화합치 못한다.<히4:2>

지금 야곱의 씨름은 바로 이 충돌의 현장이다.

 

야곱의 마음 중심에 세워져 있는 축복의 기준은 하나님이 이미 주신 축복의 기준과 달랐다.

얍복 나루에 홀로 남은 야곱에게 큰 두려움이 임하였다. 자신의 모든 것이 날아가고, 이전에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기 전에 느꼈던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겠다!”는 두려움이 현실이 되어 자신 앞에 다가 왔다.

그 두려움의 밤에,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와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한다.

 

결국 야곱은 환도 뼈를 얻어맞고 절뚝이가 되고,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뤄 이김)이라는 이름을 더 얻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의 요구를 들어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중심을 드러내 주셨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충돌되는 세력이 뚜렷이 드러나면 거기에서 그 세력을 포기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다.

자신의 원함이 무너지면 하나님의 준비한 것을 누리며 살 수 있다.

하나님은 야곱과의 씨름을 통해서 야곱의 허물을 드러내시고, 지적하고 다스려 주셔서 결국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성실한 사역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무익한 종

 

누가복음 17장에서 제자들은 얍복 나루의 야곱처럼 예수께 “믿음을 더해 달라”는 요구를 한다.

이는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평생 쓰고 남을 금액의 은행 통장을 주었는데, 아들이 아버지에게 “돈 좀 더 주세요.” 하는 꼴이다.

 

‘믿음’은 진리(예수)가 믿어진 세계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의 말씀과 그를 보내신 자와 그의 하신 일을 믿는 자이다.

믿음은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에 형성된다.<롬10:17> 사람의 마음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세계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이미 정하여지고 성취된 세계이다. 그래서 믿음은 더하고 뺄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믿음의 세계는 믿든지, 믿지 않든지 둘 중 하나를 요구한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겨 지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17:6>

 

이 예수의 말씀은 두 가지 믿음에 관한 내용을 제자들에게 제시해 준다.

 

첫째,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은 믿음이 없다는 뜻이다.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말을 통하여 예수는 제자의 마음에 말씀을 믿는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신다.

둘째,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형성된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이라도, 그 말씀을 의지하게 된다면 이 믿음은 엄청난 세력을 나타낸다는 예수의 말씀이다.

 

예수의 말씀이 이미 있었지만, 제자들은 야곱처럼 아직 하나님의 원하는 믿음은 없고 다른 믿음을 구하고 있다.

예수는 이런 제자들을 위하여 ‘믿음의 사람과 그 믿음’을 소개한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17:7-10>

 

‘무익한 종’의 마음에 형성된 믿음이 있다.

그것은 “나는 무익하다.”이다.

무익한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익한 짓이다.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익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전부이다.

이 사실을 알게 해주신 분이 주인인데,<요4:29> 이 믿음은 주인의 말씀이 종의 마음에 만들어 준 믿음이기 때문에 주인의 마음과 충돌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에는 “나는 무익하다”는 믿음은 없고, “나는 유익한 사람이 되고 싶고, 유익할 수 있다”는, 스스로 자신을 유익한 자로 여기는 착각과 그 원함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 앞에 무지하고 무익하고 무능한 자가 하나님의 지혜와 유익과 능력을 얻어 살 수 있다.

이 하나님의 권세는 ‘회개, 죄 사함, 거듭남’의 은혜를 입어 마음에 형성된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누리는 세계이다.

 

 

실족

 

아담 안에 있는 우리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을 거슬리는 자기중심적 세력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하나님을 알든 모르든,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이 세력이 없는 사람은 없다.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 ‘육의 세력’은 함께한다.

 

이 사실에 대하여 예수는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신다. <눅17:1>

실족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다. 이 실족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 실족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면, 이는 또 새로운 실족의 발을 내딛는 꼴이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걸음을 걸을 수 있는 인생은 없다. 모두 야곱처럼 절뚝거리며 실족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산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실족하지 않는 예수를 보내 주셨다.

 

율법 앞에 모든 인생은 실족하는 자인데,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여 주셨다.<갈3:13>

그리고 실족케 하는 모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 <골2:15> 

결국 하나님 앞에 우리가 실족하는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었다.

그러나 만일 이 해결된 사실을 거부한다면 이야말로 영원히 실족하는 자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눅17:1>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스스로 죄를 이길 수 없고, 스스로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실족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누리는 세계이다.

스스로 죄를 이길 수 없다는 참된 회개에 이를 때, 비로소 ‘주님의 방법과 세력’을 바라고 구하게 된다.

혈루병 여인은<막5:25> 병을 이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 고쳐 볼 의욕도 상실하게 되었다.

절망과 사망에서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이전에 없었던 소망과 믿음이 마음에 일어났다. 결국 여인의 믿음은 혈루의 근원을 마르게 하는 하나님을 경험케 한다. 죄를 이길 수 없는 자를 위하여 준비된 하나님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감기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 감기 환자는 콧물, 기침, 두통 등의 증세를 나타낸다.

만일 전능자가 이 세상의 모든 감기 바이러스를 없애버렸다면, 이 세상에 감기 환자가 있을 수 없다. 감기 바이러스가 사라진 후에 콧물이 나고 기침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는 감기 환자가 아니다. 없어진 감기와 비슷한 증세의 다른 병이다.

감기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는 ‘죄’의 세계이고, 콧물 기침과 같은 증세는 ‘범죄’의 세계로 설명할 수 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예수”<요1:29>는 십자가에 오르셨다.

나무에 달리셔서 아담으로 말미암은, 죄에 감염되어 있는 아담 안의 우리 모든 인생의 죄에 대한 심판을 대신 받으셨다. 더 받아야 할 심판이 없다.

참된 신앙은 죄를 처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심판과 부활에 참여하는 일이다.

아직 처리되지 못한 죄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이다. <히10:29> 지극히 저주스러운, 영원히 실족케 하는 마귀적인 행태이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일3:5,6>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요일 3:8>

 

 

뽕나무와 바다

 

뽕나무가 바다에 심겨질 수 있는가?

실제로 뽕나무가 뽑혀 바다에 심겨진 일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없다. 역사책이나 신문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은 없는가? 

 

사람들은 이 땅에 태어나면서 이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잘 적응하면 ‘성공’이란 서술어가 붙는다.

이 땅에 뿌리를 잘 내린 뽕나무는 쉽게 뽑혀질 수 없다. 뽕나무 뽑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이 세상에 잘 적응된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로 옮겨지는 일이다.

사람의 생각으로 생각의 뿌리를 뽑는 일은 불가능하다. 

 

노아와 에녹은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에녹은 일찍 하나님이 데려 가시므로 ‘죽음’ 없이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노아 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삶을 살다가 홍수로 물에 잠겨버렸는데, 노아는 은혜를 입어 뿌리가 뽑혀 방주처럼 물에 뜰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 앞으로 와서 긍휼을 구하였다.

예수는 그들을 제사장들에게 보내고 몸을 보이라고 지시하셨다. 그들은 가다가 몸이 깨끗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중에 사마리아 문둥병자 한 사람만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께 돌아왔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17:17>

 

예수의 이 땅에 오심은 문둥병을 낫게 하여주는 일이 목적이 아니다.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는 일은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을 알리는 표적이다.

예수는 말씀대로 이 땅에 오셨고, 자기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시려고 말씀을 따라 표적을 나타내셨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11:5>

 

이 표적은 말씀에 이미 예고된 표적이다. 의료 사업이나 사회봉사 활동이 목적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잃은 모든 것을 회복하는 일이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영적 소경이고, 영적 앉은뱅이이고, 영적 문둥이이고, 영적 귀머거리이다.

 

문둥병자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제사장을 향하여 가다가 자기 몸이 깨끗해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 명 모두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예수께 감사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고, 제사장을 만나러 갔을 수도 있고,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직장도 찾고, 결혼을 생각하고…….

 

짐승 이하의 삶을 살다가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되어서 마음이 기쁨과 희망으로 충만해졌다.

문둥병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았는데, 이제는 세상에 잘 적응해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삶의 시작이다.

 

사마리아 문둥이도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마음을 갖는 중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 앞으로 가야 하는 힘에 끌리기 시작하였다.

 

“이 분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비참한 문둥이의 삶 속에 들었던 하나님의 이야기…….

매일 생사를 오가는 삶 속에 형성된, 막연히 바라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실제로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증거로 현실에 나타났다.

 

“전능자 하나님, 그가 보내신 그리스도시다!”

 

하나님의 ‘전능’ 안에 모든 것이 있다.

문둥병이 깨끗함을 입는 것, 이 땅에서 지낼 때 필요한 모든 것, 영생, 영광…….

 

아담(사망)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감각은 그리스도를 바라는 소망과 연결되어 있다.

세상 사람들은 문둥이처럼 이 감각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

감각을 갖는다면 비로소 예수의 음성이 들린다.

예수와 함께하는 자는 ‘이 땅에 머리 둘 곳이 없는’ 예수처럼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본향을 향하여 가는 나그네의 삶을 산다.

 

 

환도뼈

 

씨름으로는 야곱을 이길 수 없어서 결국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치셨다.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이 된 것 말고는 형편이 바꾸어진 것은 없다.

복을 준 것이 아니라 복이 있는 줄 알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왔지만, 그의 백성들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와 실제로 오신 그리스도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 양 예수가 드디어 예루살렘에 오셨는데 아무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성전에 들어가셨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열심히(?)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는 채찍으로 성전을 뒤집어엎으셨다. <요2:14-16>

 

나는 이전에 이 사건을 멀리 관람석에 앉아 구경하는 관객이었는데, 하나님은 나를 객석에서 무대로 옮겨 주셨다.

야곱이 환도뼈를 치신 것처럼 예수의 채찍은 나를 뒤집어엎었다.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하나님을 향한 선한 마음, 진실함, 열심이 뒤집어엎어졌다. 황당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한 마음이 되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세워져 있던 것들이 가짜인 사실을 알게 되면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연출에 참여할 수 있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2:19>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는 우리의 경배를 받을 목적으로 오신 분이 아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고<히9:28> 오셨다.

‘죄’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다. 이 패역한 세력을 드러내시고, 그 세력에 당해 주시고, 처리해 주셨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0>

 

 

가시 면류관

 

양자(養子)는 원래 아버지와 상관이 없는 자인데, 아버지의 사랑과 약속으로 자격을 얻는다.

나의 근본은 ‘기생충’ 같은 존재이다. 붙어먹고 사는 인생이지만, ‘내 것’인 줄 착각하고 살면서 때로는 숙주를 공격하기도 하는 해충이다.

어느 날 숙주 되신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사41:14>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사 41:9>

 

‘기생’ 관계에서 ‘공생’ 관계로 자격을 바꾸어 주셨다.

마치 둘째 아들은 붙어먹고 살 마음으로 돌아가려는데<눅15:19>, 아버지는 달려와 품꾼이 아니라 아들임을 뚜렷하게 하셨다.

나는 이런 아버지가 참 감사하고, “내가 참 복된 놈이다.”는 마음이 된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11:12>

 

천국은 ‘힘’으로 얻고 ‘힘’으로 누리는 세계이다.

이 ‘힘’은 하나님에 내게 주신 ‘자격’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의 영’을 받은 아들의 자격을 얻었다.<롬8:15>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 3:17>

 

아버지가 나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이유는 내가 ‘아들’이기 때문이다.

젖먹이가 부모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잘 먹고, 잘 싸면 부모의 기쁨이 된다.

 

가시 면류관…….

이 땅에 머무는 동안에 하나님 앞에 나의 모습니다.

나의 육체는 오늘도 여전히 가시와 엉겅퀴를 내지만, 내 마음에 임한 아버지의 인자와 진리가 나를 보호하고 아버지의 세계를 누리게 한다.<시40:11, 잠16:6>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 내가 있다.

주께 씌운 가시관은 영광의 면류관이 되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5,6>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

나의 허물과 연약함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재료가 되었다.

불 살라 없어져야 하는 가시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고<출3:2> 빛을 발하는 것처럼…….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사6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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