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마
Digital graphics,
30.0cm x 20.5cm, 300 ppi,
2013.
3-2 하나님을 만나는 이야기
라마의 통곡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 앞에서 두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기 전에 자신의 아들들이 처참하게 처형을 당하는 광경을 목도하였다. <왕하25:7>
자식이 죽는 장면을 그 아비가 목격하는 일, 게다가 두 눈이 뽑혀 그 최후의 참혹한 장면이 뇌리에 새겨지고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잔상으로 남았다면, 이 최악의 상황과 그 고통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또 하나, 자신의 결정 때문에 자식들이 죽어야 했다면 그 참담한 아비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
580여 년이 지난 후 베들레헴에서 이 보다 더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베들레헴에 사는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이 모두 살육 당한 사건이다.
품고 있는 아이를 빼앗기고 무참히 살해당하는 참황을 겪는 그 어미의 마음을 문장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어미는 몇 번이고 혼절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격한 감정으로부터 조금씩 정신을 가다듬으며 부모들과 마을 사람들은 이 참담한 상황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아이를 살해한 자가 누군지 알면서 헤롯의 군사와 헤롯왕에 대한 원한은 하늘에 사무쳤다.
그리고 베들레헴 사람들은 헤롯왕이 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죽여야 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멀고 먼 동방에서 박사들이 왕궁으로 찾아 왔고, 헤롯 앞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는 일이 있었다.
헤롯은 유대 왕 앞에서 유대 왕을 찾는 이 황당한 질문을 듣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물었는데, 바로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한다는 성경에 예언된 사실을 알게 되고 박사들에게 들려주었다.
헤롯은 성경을 믿는 자가 아니다. 박사들이 왕을 찾아 만나면 자기도 경배하겠으니 알려 달라는 교활한 부탁을 했으나,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인 아기 예수를 만나 경배한 후 헤롯을 피하여 돌아간 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헤롯은 베들레헴 지경의 모든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을 살육하는 잔행을 저질렀다. <마2:1-17>
시드기야의 일과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사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부모 면전에 자식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다. 그리고 부모의 선택의 결과로 심판이 자식에게 임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결과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결론적인 부분은 인생들의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다. 그리고 이 패역에 대한 심판의 기록이고, 여전히 패역한 우리 인생을 구원하기 위한 경고이다.
부모가 자녀를 잃는 일은 사랑의 대상을 잃는 슬픔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과 패역한 인생과의 관계를 지적하고 계신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사1:4>
시드기야와 베들레헴 사람들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경고를 만홀(漫忽)히 여겼다.
아비에게 한만(汗漫)히 하고 소홀히 여기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를 무시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 2:18>
‘라마’는 베들레헴 지경의 옛 표기이다.
이곳에서는 반드시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하나님의 예시(豫示)가 선지지 예레미야의 입을 빌어 선포되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자식을 낳고 키우는 일을 베들레헴이서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베들레헴이서는 결국 큰 곡성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예시와 경고를 무시한 결과이다.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도 예약된 사실이었다. 구약 성경에 300번 이상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아무도 탄생을 기다리고 함께하는 자가 없었다. <요1:11>
하나님의 성경도 있고, 예언도 있고, 예시된 증거도 있고, 서기관도 있고, 제사장도 있고,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말씀을 성취하는 하나님에 속하여 함께하는 마음은 없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 29:13>
시드기야와 베들레헴 사람들의 참혹한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그 마음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사람의 계명에 익숙한 마인드’를 가진 우리 모든 인생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계명’은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섞인 계명다. ‘라마의 통곡’이라는 하나님의 예시가 있지만, ‘사람의 계명’은 베들레헴에 머물며 아이를 낳고 기르게 하는 힘을 공급한다.
‘라마의 통곡’은 우리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라마’라고 불리는 육체에 거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 육체는 이미 하나님의 판정이 선포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땅이다. <창6:3, 사40:6-8>
이곳에는 진리와 생명이 없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을 거부한다. <롬8:6,7>
인생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고 섬기는 삶을 누리는 세계, ‘영적 라마’이다.
라헬은 야곱의 아내이지만 남편에게 속하지 못하여서 하늘에 속한 복을 누리지 못하고 평생 욕망에 끌리는 고통 가운데 살았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허락한 모든 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자기 세계’가 포기되지 않아서 참 생명의 세계를 누리지 못한다.
하나님의 권고하심으로 은혜를 입어 아들을 낳을 때, ‘베냐민(오른 손의 아들)’의 세계를 누리지 못하고 ‘베노니(슬픔의 아들)’라는 탄식으로 생을 마치고 베들레헴 지경에 장사되었다. <창35:17-20>
‘라헬’은 영적 라마에 거하는 자의 대명사로 불릴 수 있다.
생명과 같은 아이를 잃은 슬픔이 원한으로 변하고, 원수 헤롯이 저지른 일에 동방 박사와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일이 연루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베들레헴의 부모들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냉정한 하나님의 판단 앞에 섰을 때, 아이의 죽음은 자신의 선택으로 말미암은 결과로 인정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패역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무시한 삶의 결과가 된 어린 생명의 참혹한 죽음의 잔상은 결코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고통이다.
그러나 이 고통의 잔상을 덮을 만한 하나님의 세계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소망스런 세계는 바로 ‘예수’이다.
말씀을 무시한 심판의 참혹한 현장에서 예수는 탄생하셨다.
아무도 그를 기다리고 환영하지 않았지만, 예수는 라마에서 통곡하는 패역한 백성을 위해 오셨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삶을 사는 자신의 범행의 대가로 어린 아들이 죽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이 패역한 우리를 위한 희생양으로 오셨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우리가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원수 되었을 때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탄생하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다. <롬5:6-10>
라마의 곡성이 있은 지 30년이 지난 어느 날,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문 가까이 오셨다.
‘나인’이라는 성의 이름은 ‘즐거움’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성은 즐거움은 잃어버리고 큰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한 과부의 아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과부는 주위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아들의 시체를 든 장례 행렬을 따라 성을 나와 매장지를 행해 간다. 그 녀의 뒤를 따라 친척, 마을 사람들이 따른다. 슬픔의 행렬이다. 이 비통의 행렬은 인간의 역사상 한 번도 멈추어진 적이 없다. 그리고 아무도 이 행렬, 이 사망의 세력에서 스스로 벗어난 사람은 없다.
이 비탄의 행렬 앞으로 예수께서 오셔서 과부에게 말씀 하였다.
“울지 말라.”
그리고 죽은 청년의 관에 손을 대었다. 사망의 행렬이 멈춰졌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과부의 아들은 일어났고, 예수는 이 부활의 청년을 그의 어미에게 주었다.
30년 전에 그 통곡의 땅에서 태어난 예수는 나인성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다.
“울지 말라”는 말씀은 모든 인생의 슬픔과 고통과 사망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고,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영원한 희락의 회복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결코 형식적이고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다. 말씀 안에 울지 않아도 될 충분한 것들이 준비되고 성취되어 있다.
“일어나라”는 말씀도 죽은 청년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여 잠시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사역을 나타내는 말씀이 아니다. 부활이고 영원한 생명이다. 예수가 나인성의 과부를 위한 사역은 잠시 아들과의 관계를 연장해 주는 일이 전부가 아니고 사망의 행렬을 멈추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내는 일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
“울지 말라.”
이 말씀은 나인성의 과부에게, 30년 전 베들레헴의 부모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 모든 인생에게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