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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성경 공부 14

너희는 정탐들이라/ 창42:8-12 20230322

정탐(偵探), Spy는 복수(複數)의 신분을 가지고 가려진 신분을 위하여 꾸며진 신분으로 일하는 자다.

 

요셉의 형들이 애굽의 총리 앞에 곡물을 사려는 신분으로 섰지만, 총리는 이들을 애굽의 틈을 엿보려는 정탐하는 자들로 여긴다.

 

요셉의 형들은 날벼락과 같은 이 상황을 시작으로 애굽의 총리가 된 동생 요셉의 계략(?)에 끌려간다.

 

결국 요셉의 형들의 가려져 있던 은밀한 것들이 다 드러나면서 요셉의 꿈은 성취되고 형들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 독실(篤實)하고 진실한 자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을 위한 것이다. *[마9:13, 막2:17] 

 

그러나 요셉의 형들처럼 자신의 근본을 잊고 하나님의 것을 얻으려는 노력은 꾸며진 신분으로 위장한 간첩 활동과 같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첩(重疊)된 신분이 있다.

육에 속한 이전 신분과 하나님께 속한 새 신분이다. *[고후5:17]

그리스도인에게 이 두 신분이 충돌*[갈5:17]이 있고, 그 곳에서 영의 인도함을 받는 새 신분의 삶을 살 수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5:13]

 

그리스도인의 삶은 눈에 보이는 이전 것을 허상으로 여기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것을 실상으로 여기는 삶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5:6-7]

20230322너희는정탐Artist Name
00:00 / 48:39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 히9:26-28 20230319

예수께서는 세상 끝에 오셨다.

예수와 함께하는 자는 첫번째 세상을 예수와 함께 끝내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삶 가운데 두번째 나타나실 예수를 기다린다. *[고후5:17, 요14:26, 행1:11]

그러나 첫번째 세상을 예수와 함께하지 못한 사람은 더 이상 예수와 상관이 없다.

 

모든 인생에게 첫번째 세상은 죄가 처리될 수 있는 기회이다.

죄를 알고 인생을 알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 하나님 안에 속한 은혜의 세계가 예수와 함께하는 세계이다. *[롬3:23-24]

 

첫번째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세상 죄를 담당하셨다.*[요1:29]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다 이루었다"는 확증을 남기시고 첫번째 세상, 이 땅에서의 사역을 완성하셨다.*[요19:30]

 

이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삶과 새 몸을 입는 구원에 이르게 한다.*[눅1:77, 살전4:16-17, 고전15:51-52]

 

이 땅에 남겨 놓은 '죄 사함에 관한 하나님의 사역'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히10:16-18]

재림 예수는 이 땅에 임하지 않는다.*[마24:23-27]

 

두번째 나타나실 그리스도는 공중에 임하시며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과 함께하신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8:23]

20230319죄와상관없이Artist Name
00:00 / 51:29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는 자/ 마23:29-36 20230315

선지자의 비석을 꾸미는 자가 자신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할 자로 여긴다면, 이 사람은 스스로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증거하는 거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은 모세를 믿는 자들이 아니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요5:46]

 

율법을 알지만 율법에 다스려지지 못한 사람은 아는 그 율법 위애 앉아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죽인다.

 

할례가 마음에 이루어지지 못한 사람은 그 할례가 자신을 꾸미는 장식이 된다.

 

비석은 시체를 묻은 장소의 표시이다.

비석을 꾸미는 일이 왜 필요한가?

 

무덤을 꾸미는 자의 마음이 "나의 할아버지가 당신을 죽였습니다" 아니면, "내가 그 때 있었다면 당신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는 마음인가?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우월주의 세력으로 진동한다.

이 우월주의는 사람의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의 집합체이고, 오늘날 이 세상에 가득 찬 권세*[엡2:2]이다.

 

육체를 신뢰하는 일, 사람이 세워지는 일을 간과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세상 교회이다.

이 세상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모양을 내는', '비석을 꾸미는 일'에 집착한다.

20230315의인들의비석Artist Name
00:00 / 37:38

다윗의 행복/ 롬4:4-8 20230312

다윗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불법을 사하심 받은 자, 죄를 가리우심을 받은 자, 하나님께서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이다.

 

이 복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하신 일,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 믿어진 자들이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사43:25]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과 결정에 대한 확신은 은혜를 깨달은 자들의 열매이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1:6]

 

이 복된 구원의 세계는 인생의 수고를 용납하지 않는다.

오직 은혜를 입은 자들의 마음에 확신과 능력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사역이시다.

 

다윗의 행복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 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윗이 누리는 복은 시냇가에 심겨진 푸른 나무의 형통함과 같은 삶이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된 나라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1:30]

 

오늘 우리는 이 예수를 인하여 다윗과 같은 행복을 누리는 자들이다.

20230312다윗의행복Artist Name
00:00 / 47:06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0 20230308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는 증거로 로마서 1장 18절로 시작하여 3장 18절을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인들을 위하여 율법을 주셨고 이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한다.

 

죄를 깨닫는 일, 죄를 아는 지식과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롬1:17, 레4:28]

죄를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빛깔'의 세계를 알 수 없다.

이 세계는 말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러나 소경이 눈을 뜨는 순간 '빛깔'의 세계를 깨달을 수 있다.

 

이처럼 죄 가운데 태어난 인생도 스스로 죄를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사람의 중심이 비춰지면 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다.

 

유다의 죄가 단뿔에 새겨진 것처럼*[렘17:1], 모든 죄는 하나님의 권위(뿔)에 대한 불순종이다.

하나님의 권위는 '진리의 말씀'에 있고 말씀을 통하여 나타난다.

이 권위에 대한 불순종이 자신의 마음 중심에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는 사실을 깨닫는 자가 죄를 깨닫는 자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이 패역이 깨달아진 자들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 *[단9:9]

20230308죄를깨달음 Artist Name
00:00 / 54:25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롬2:29-3:4 20230305

마치 지구의 자전을 믿고 있는 사람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도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할례 된 마음은 육신의 생각과 감정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나타낸다. *[갈5:17, 롬8:13]

 

인생은 스스로 자기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제어할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사 64:6]

인생이 중력을 거스릴 힘이 없어서 땅에 붙어 사는 것처럼, 인생의 중심에 죄를 이길 힘이 없다. *[시65:3]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렘4:4] 

 

할례는 육체에 속한 인생이 하나님께 속하게 하는 유일한 소망의 규례이다.

 

백세가 된 아브라함은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생각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

이는 인위적인 결심이나 열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이고, 아브람의 삶에서 아브라함의 삶으로의 도약이다.

 

이 도약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려고 애굽으로 들어갈 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여호수아가 요단을 건넌 후 여리고성을 앞에 두고 길갈에서 행한 할례를 통하여 설명된다.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길을 앞에 두고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취하여야 할 예법이다.

 

할례된 마음에 그어진 선은 사람과 하나님을 나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을 참되시다.

20230305할례는마음에할찌니Artist Name
00:00 / 51:56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창6:8,9,22 20230301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롬8:14]일진데, 아버지의 영의 인도함을 거부한 아들은 더 이상 아들일 수 없다. *[사1:4]

 

하나님께서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슬퍼하신 이유는 모든 사람이 육체 뿐인 인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홍수를 통하여 보여주신 심판은 하나님의 영을 거부한 모든 육체에 대한 심판이다.

그리고 방주를 통하여 보여주신 구원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의 회복이다.

 

'육체 뿐인 인생'에 대하여 '육체에 대한 결별을 선고(宣告)'하신 하나님 앞에 노아는 결코 특별하지 않다.

모든 인생은 불의하다. *[롬3:10-18]

물 속에 잠긴 모든 인생과 노아와의 다른 점은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는 하나님의 증거 외에 아무 것도 없다.

 

홍수 전에 노아의 마음에 홍수의 심판이 임하였다.

이 저주와 심판에 대한 믿음이 방주를 짓는 일에 참여하게 한다.

 

구원의 믿음은 심판 이전에 누리는 세계이다.

홍수 전에 방주가 준비되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심판 이전에 결정된다.

하나님의 모든 심판은 구원이 예비된 심판이다.

 

은혜를 입은 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의'와 '완전'이 세워진다.

이 '의와 완전'은 심판의 경고에 대한 '순종과 믿음'이, 구원의 약속으로 이어져 자리잡은 노아의 믿음이다. *[히11:7]

'의와 완전'은 육신의 세력이 거세된 세계이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노아는 완전하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창6:9]

 

이 하나님의 판정은 홍수 이후의 것이 아니다.

육신에 속한 노아는 홍수 전에 이미 경고의 말씀과 함께 죽었고, 하나님의 영의 이끌림을 받는 노아는 방주를 통하여 얻은 새 생명을 누린다.

 

방주에 보존된 것이 결코 350년을 더 산 노아의 수명만이 아니다.

홍수와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과 부활을 전하는 예표*[벧전3:21]이다.

20230301노아는의인이요Artist Name
00:00 / 56:36

판단하는 자, 표면적 유대인/ 롬2:28,29 20230226

로마서 1장의 '불의로 진리를 막는' 세력의 구체적인 형상이 로마서 2장에서 '표면적 유대인'의 모습으로 설명된다.

 

바울의 사역 중에 바울을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게 한 자들은 표면적 유대인으로 여겨진다. *[빌3:2,18]

 

바울은 '판단하는 자'를 향한 탄식으로 로마서 2장을 기록하였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을 따라가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복음을 판단하는 불의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창2:17]

 

아담이 "먹는 날에 정령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것처럼, '판단하는 자'는 복음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판단(하나님의 의)을 듣고도 자신의 판단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회개케 하심, 용납하심, 길이 참으심은 불의한 인생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이고 복음이다.

 

구원은 이 하나님의 마음에 감화되어서 자신의 모든 판단(불의)을 내려 놓고 할례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판단(의)과 결정에 참여하는 일이다.

 

표면적 유대인은 할례되지 못한 마음으로 판단하는 자의 길을 간다.

복음을 알고 있지만 복음에 다스려지지 못한 마음은 복음을 대적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들이야말로 무늬만 복음을 말하는 자이고 오늘날의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겠는가?

20230226판단하는자Artist Name
00:00 / 52:41

더 나은 본향으로 가는 나그네/ 히11:13-16 20230222

눈에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명하여 주기 위한 잠시 세계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안에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다스려진 자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산다.

 

말씀에 다스려진 믿음을 가진 아벨은 말씀을 거부하는 가인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고 그 죽음이 아벨의 옳음과 하나님께 속한 아벨임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부르셨다.

 

아브라함은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으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자기 몸에서 어떻게 후사가 나올지, 어떻게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은 자손이 있게 될지를 다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을 믿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다.

약속대로 가나안 일경을 소유할 수 있었고 약속대로 이삭을 낳았지만, 그 보이는 것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또 말씀을 따라가는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에 머물러야 할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떠났고, 승전에 함께한 엘리에셀을 후사로 삼아야 할 상황에서 헤아릴 수 없는 말씀을 따라 갔고, 이삭을 품고 살아야 할 상황에서 말씀을 따라 모리아 땅으로 갔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만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만한 상황을 배경으로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뒤로 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더 나은 본향을 향하는 나그네의 본으로 삼으셨다.

 

오늘도 믿음이 있는 자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성을 찾아가는 행복한 나그네의 길을 걷는다.

물론 이 나그네는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세계가 더 복되고 아름다운 줄 맛 본 자이다.

20230222더나은본향으로Artist Name
00:00 / 48:10

삼년된 암소/ 창15:8-9 20230219

아브람은 왕들과의 전쟁에서(창14장) 집에서 길리운 자 318인을 이끌고 나아가 승리하였고, 멜기세덱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도 있었지만 어떤 두려움이 아브람에게 있었다.

 

창세기 15장은 이러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내가 너의 방패이고 상급이다"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그의 마음을 이끄셨다.

 

아브람의 마음에 자리잡은 자신의 상속자는 엘리에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의 마음에 받아드리기에 어려운 후사에 관한 계획을 제시하였다.

 

자손을 생산할 수 없는 죽은 몸과 같은 아브람이*[롬4:19]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려면, 아브람의 생각과 마음에 품고 있는 '엘리에셀'을 내려 놓아야만 한다.

 

결국 아브람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너의 후사이고, 네 자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으리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증표를 구하는 아브람에게 삼년 된 암소, 암염소, 수양과 비둘기를 헌물로 취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 번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이삭을 취하라는 말씀을 기억케 한다.

 

소나 양에게 삼년이라는 연령은 번식이 가장 왕성한 시기이다.

목축자에게 가장 귀히 여길만한 것이다.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 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욥22:24,25]

 

아브람이 엘리에셀을 내려 놓는 일은 아브람의 생각과 계획과 삶의 축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옮겨짐을 의미한다.

 

이 믿음은 마치 죽은 몸을 산 몸으로 여겨야 하는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일*[빌3:10]과 같다.

 

아브람은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 아래 심히 두려워하였으나 '하나님을 믿는' 쪽으로 이끌림을 받았다.

 

삼년된 암소가, 엘리에셀이 아브람에게 귀한 것이지만 이것들이 아브람을 두려움에서 건져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방패가 되신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시25:10] 

20230219삼년된암소Artist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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