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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교회 성경 공부 노트/ 신동국 선교사

보리떡과 오천 명과 표적/ 요6:1-15/ 20231025

흠모할 것 없는 보리떡이고, 오천 명이 먹을 만한 양의 음식이 아니지만, 이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넉넉히 먹고 남은 것이 열 두 바구니가 되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보리떡과 같은 형상*[사53:2]으로 오셨고 그리스도이신 표적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예수를 찾아 온 큰 무리의 구하는 것과 예수께서 주시려는 것이 달랐다.

큰 무리가 본 표적*[2절]과 니고데모가 본 표적*[요3:2]은 표적의 껍질이다.

큰 무리는 표적 속의 표적*[26절]을 볼 수 없었다.

 

결국 보아야 할 표적을 보지 못한 무리는 많이 물러가고 다시는 예수와 함께할 수 없게 되었다. *[66절]

 

예수를 찾아 온 큰 무리에게는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원함과 열심이 있다.

그러나 예수의 원함은 섬김을 받는 일이 아니라 먼저 섬겨주셔야 할 일이다.

 

그것은 유월절 어린 양을 먹고 피를 바르는 절기에 함께하고 그 기록된 말씀을 성취하는 일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6,57절]

 

보리떡으로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은 하나님의 어린 양을 증거하는 표적이다.

 

그러나 떡을 먹은 큰 무리는 표적 속의 표적인 하나님의 어린 양과 연결되지 못하였다.

연결될 수 없는 이유는 큰 무리가 원하는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유대인의 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을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십자가에 달리심은 이 큰 무리와 모든 자를 위한 마지막 표적이다.

20231025보리떡과오천명Artist Name
00:00 / 48:56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요5:21-29/ 20231022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요5:21-29]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 안에서 형성된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물 밖으로 나와도 여전히 우물 안의 개구리이다.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눅1:76-79]에 옮겨진 자는 옮겨지기 전의 사고(思考)에서 벗어난 자이다. *[엡4:22-23, 롬8:14-16]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예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 간 일은, “죽은 자가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일의 한 모습이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두움에서 빛의 세계로 옮겨지는 일이다.

 

그러나 옮겨진 자가 옮겨지기 전의 사고 방식으로 산다면, ‘산 자’가 아니라 ‘산 자’의 모양을 내는 ‘죽은 자’이다.

 

예수께서 삼십 팔년 된 병자를 일으키시고,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다. *[14절]

 

‘더 심한 것’은 ‘산 자’의 모양을 내는 ‘죽은 자’의 삶이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3:3]

 

교회는 교리(敎理)를 닦는 곳이 아니라 완전함을 누리는 곳이다. *[히6:1-8]

 

계시록 3장의 사데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은 완전함을 누리지 못하는 죽은 행위에 대한 책망이다. *[계3:1-5]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완전한 삶은 육체의 지혜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삶이다. *[고후1: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2:12,13]

20231022죽은자들을 일으켜Artist Name
00:00 / 31:57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요5장/ 20231018

유대인 명절의 시작은 유월절이다.

유월절 어린 양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없다면 유대인이라고 할 수 없다.

 

유대의 명절이 가까운 어느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양문(羊門)에 오셨다.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고달프고 고통스런 인생살이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와 치유를 기대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바라는 하나님에는 유월절 어린 양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께서 삼십 팔년 된 병자를 보시고, 아시고, 묻고, 말씀하셨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께서 삼십 팔년 된 병자에게 하신 이 말씀에는 두가지 요구가 함께 한다.

병에서 나음을 입는 일과 그 누웠던 자리를 들고 가는 일이다.

 

이 두가지 일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은 일과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무교병 반죽을 어깨에 매고 애굽에서 광야로 옮겨지는 일과 견주어 설명될 수 있다.

 

유월절의 구원은 생명을 얻은 백성이 애굽을 떠나 광야로 옮겨져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삶으로 완성된다.

 

새 생명을 얻은 일은 그 생명의 세계를 누리는 일과 함께 하여 온전한 구원을 이룬다.

 

삼십 팔년 된 병자가 누웠던 자리는 세상의 경험으로 굳어 버린 생각의 자리이고, 사망의 세력이 충만한 곳이고, 영적 애굽이고, 곧 무덤이다.

예수께서는 이 ‘자리’에 지배 당하는 삶이 아니라 지배하는 삶을 명하셨다.

 

유월절과 무교절이 하나인 것처럼, 완성된 구원은 ‘구원의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다.

만일 함께하지 못할 때, 구원의 하나님은 박제화 된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삶’은 세상과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할례된 마음과, 사망의 세력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신분으로 하나님의 절기를 누리는 삶이다.

20231018네자리를들고Artist Name
00:00 / 48:51

우물가의 예수/ 요4:13-25/ 20231015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마셔도 마셔도 해결되지 않는 목마름이 있는 곳을 위하여 준비된 세계이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 목마름을 해갈하여 주시려고 우물 곁에 앉으셨다.

 

마실수록 목마른 물이 있고 더 이상 갈증을 겪지 않게 하는 물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있다.

사마리아 여인의 삶은 목마름의 연속이었고, 해갈의 소망으로 하였던 여섯 번의 결혼이 목마름을 해결해 주지 못하였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렘2:13]

 

하나님의 백성이 생수의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판 웅덩이에서 얻는 생수로 살아 보려고 하였으나 그 웅덩이에서 얻은 물은 마셔도 목마름이 해결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이 걷는 메마른 삶의 길목에 예수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스도’를 만났고 생수를 마실 수 있었다.

20231015우물가의예수Artist Name
00:00 / 48:19

니고데모와 예수/ 요2:10-15/ 20231011

예수께서는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을 근거로 땅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말씀으로 구체적인 거듭나는 세계를 설명하여 주셨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고 말씀에 이끌릴 수 없었다.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라는 말씀을 끝으로 더하셨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이 세 가지 말씀 안에 담긴, 반복된 하나님의 두 가지 결정된 세계가 있다.

 

하나는 ‘반드시 버려져야만 하는 세계’이고 또 하나는 ‘버린 자가  얻고 누릴 수 있는 세계’, 곧 하늘에 속한 세계이다.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가기 위하여 버려져야만 하는 세계가 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15:42-44]

 

썩을 것이 썩은 줄 아는 믿음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는 믿음으로 옮겨진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이끌림을 받지 못하는 것은 버려져야만 하는 것이 버려지지 못하여 나타나는 반응이다.

20231011니고데모와예수Artist Name
00:00 / 46:01

물로 된 포도주/ 요2장/ 20231008

바로의 꿈, 7년 풍년과 7년 흉년은 이 세상과 모든 인생에게 이미 주어진 결정이다.

이 법칙은  가나 혼인 잔치에도 적용된다.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은 세상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다.

물이 포도주가 된 일은, 맛 없는 액체가 맛 있는 액체로 변한 이적이다.

이 이적은 예수께서 무엇을 나타내시려는 의도이신가?

 

작은 시골 농가의 혼인 잔치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하였다면 더 없이 즐겁고 영광스런 연회일 것이다.

그리고 우주의 질서를 거스르는 이적을 보이신 것은 하나님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이적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예시하는 일이 리라.

 

물이 포도주가 된 일은 예수께서 이 세상을 향하여 하실 모든 일의 상징적인 표적이다.

그리고 없는 것을 있게 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기쁨 잃은 이 세상을 기쁨 있는 새 세상으로 회복시키시는 첫번째 이적이시다.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은 기쁨 없는 삶에서 기쁨 있는 삶으로 옮겨진 구원이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시 4:7]

20231008물로된포도주Artist Name
00:00 / 40:31

깨뜨려진 법판과 증거궤 안의 증거판/ 출34:1, 29/ 20231004

3,500여 년 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셨다.

그 곳에서 하나님의 법을 반포하시고 이동식 성막의 제도를 보여주시며 열 가지 계명을 돌판에 새겨 주셨다.

이 돌판을 증거판, 법판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두 번 돌판을 새겨 주셨다.

시내산에서 첫 번째 돌판을 가지고 내려오는 날, 이 돌판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뛰노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던져 깨뜨려졌다. 돌판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이 집행된 결과이다.

 

두 번째 돌판은 첫 번째 돌판이 깨뜨려지기 전에 이미 그 용도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장소가 정하여져 있다.

 

-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출25:21]

 

이 증거판은 지성소 안의 속죄소 아래 법궤 안에 두기로 결정되어 있다.

첫 번재 돌판이 죄와 사망의 법을 집행하는 심판의 역할을 하였다면, 두 번째 돌판은 속죄소(시은좌)4) 아래에 두어 대속의 피를 증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오직 둘째 장막(지성소)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히9:7]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9:22]

 

첫 째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생을 향하여, 하나님의 법은 이 두 돌판에 나타난 역할을 수행한다.

20231004깨뜨려진돌판Artist Name
00:00 / 43:34

깨뜨려진 법판과 증거궤 안의 증거판/ 출34:1, 29/ 20231004

3,500여 년 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셨다.

그 곳에서 하나님의 법을 반포하시고 이동식 성막의 제도를 보여주시며 열 가지 계명을 돌판에 새겨 주셨다.

이 돌판을 증거판, 법판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두 번 돌판을 새겨 주셨다.

시내산에서 첫 번째 돌판을 가지고 내려오는 날, 이 돌판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뛰노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던져 깨뜨려졌다. 돌판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이 집행된 결과이다.

 

두 번째 돌판은 첫 번째 돌판이 깨뜨려지기 전에 이미 그 용도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장소가 정하여져 있다.

 

-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출25:21]

 

이 증거판은 지성소 안의 속죄소 아래 법궤 안에 두기로 결정되어 있다.

첫 번재 돌판이 죄와 사망의 법을 집행하는 심판의 역할을 하였다면, 두 번째 돌판은 속죄소(시은좌)4) 아래에 두어 대속의 피를 증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오직 둘째 장막(지성소)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히9:7]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9:22]

 

첫 째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생을 향하여, 하나님의 법은 이 두 돌판에 나타난 역할을 수행한다.

20231004깨뜨려진돌판Artist Name
00:00 / 43:34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 요1:11-14/ 20231001

하나님이 말씀을 통하여 나타났고, 만물이 말씀으로 지어졌고, 말씀 안에 생명 되신 예수가 있는데, 그 예수는 사람들의 빛이다.

 

어두움에 속한 사람은 이 빛을 깨달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먼저 보내신 요한을 통하여 빛을 증거하고 믿게 하려 하였다.

 

결국 영접하는 자, 이름이 믿어진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 [요1:1-13 요약]

 

영접의 시작은 요한의 증거다.

요한의 증거를  영접하는 자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이 함께한다.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요5:35]

어두움이 어두움인 줄 알게 하는 등불이다.

어두움이 어두움인 줄 알게 된 믿음이 예수를 아는 믿음으로 옮겨지게 한다. *[요5:25]

 

어두움이 없으면 빛이라는 개념도 형성될 수 없다.

빛의 사역은 어두움이 있는 곳에서 시작한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4:6]

 

요한의 등불은 어두움을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하나님을 알게 한다.

 

어두움이여야 빛을 영접할 수 있다.

어두움인 줄 알게 된 믿음 위에 빛을 알고 누리는 믿음이 함께 한다.

 

이 믿음은 들려지는 말씀에 대한 반응이다.

말씀을 영접하는 자에게 순종과 믿음과 하나님이 함께 하고, 영접하지 않는 자는 불순종과 불신과 교만이 함께한다.

20231001영접하는자Artist Name
00:00 / 46:36

믿음이 연약한 자/ 롬14:1-9/ 20230927

교회는 믿음이 있는 자의 모임이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믿음이 연약한 것이지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믿음에는 자신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와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함께한다.

 

믿음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구원의 근거이고 구원의 삶을 누리게 하는 힘이다. *[히11:6]

 

아브람의 마음에 자리 잡은 자신의 상속자는 엘리에셀이었다. *[창15:2]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의 마음에 받아드리기에 어려운 후사에 관한 계획을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아브람은 흘러가던 생각의 방향을 달리한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구하시는 믿음은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다.

 

풍향계가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하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종)은 하나님(주인)을 향한다. [잠언 8:34]

풍향계의 방향이 풍향계에 달린 날개에 의하여 정하여지듯이, 하나님을 향하는 방향은 믿음에 의해 결정된다.

 

만일 교회 안에 방향을 잡지 못하는 지체가 있다면 “믿음이 연약한 자”이다.

이 연약한 자를 위하여 믿음이 있는 지체의 할 일은 무엇일까?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롬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것은 그의 주인을 판단하는 것이다.

교회 안의 믿음이 연약한 자의 하나님과 믿음이 있는 자의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이 아닌가? *[엡4:1-6]

 

지체의 연약함은 온 몸의 연약함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 연약함을 위하여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들이 있는 곳이고 성령의 간구하심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준비되어 있는 곳이다.

20230927믿음이연약한자Artist Name
00:00 / 47:29

예수의 흔적/ 갈6:11-18/ 20230924

바울을 괴롭게 하는 세력에 대하여 바울이 준비한 방패와 창은 마음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이다.

 

바울을 괴롭게 하는 세력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자들이다.

 

이들 중에 스스로 된 줄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복음에 사족(蛇足)을 다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예수의 흔적이 아직 새겨지지 못하였든지, 아니면 예수의 흔적에 만족할 수 없는 자들이리라.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생명을 얻는 표가 된 것처럼 예수께서는 표적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 표적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유월절이 새날의 시작*[출12:2]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들의 새날을 여는 시작이다.

세상과 나와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kjv) [갈6:14]

 

육신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는 자는 예수의 흔적이 흐려질 수 있겠으나, 사망의 못 자국이 뚜렷한 자에게는 그 예수의 흔적으로부터 공급되는 힘으로 여호와의 절기를 누리면 산다.

 

하나님의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려는 자들이 있다.

이들을 인하여 비록 괴로움은 있으나 이미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도는 믿는 자의 마음에 더욱 뚜렷이 새겨질 뿐만 아니라 교회를 어지럽히는 세력으로 인해 복음의 증거는 도리어 견고함을 얻는다.

 

성도들의 마음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은 이미 성취되고 완성된 하나님의 거룩한 작품이다.

20230924예수의 흔적Artist Name
00:00 / 49:43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사41:8-9,14/ 20230920

–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방어와 공격의 삶"이라는 인생사(人生史)에 나타난 이 명분은 라멕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까지 인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테러의 배경에도 이 구실은 여전하다.

그러나 테러 집단의 명분 속에는 스스로 자신을 옳게 여기므로 형성된 증오가 있다.

그리고 이들의 증오의 결과는 또 다른 증오를 낳는다.

오늘날 개인이나 국가가 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사람에게 기생충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기생충은 자신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숙주를 공격하기도 한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가 아니고 싫고, 밉고 가증한 존재이었다.*[요15:23-24]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종교 공동체를 지키려고 테러를 저질렀다.

이스라엘의 원래 이름이 야곱이다.

 

야곱은 예수를 버렸으나,*[사53:3] 하나님은 야곱을 싫어 버리지 아니하셨다.

20230920지렁이같은너Artist Name
00:00 / 37:20

은혜로 굳게 함이 아름답고/ 히13장/ 20230917

히브리서 마지막 13장의 내용은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로 시작하여 “나의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로 정리되었다.

 

중심 내용은 교회의 대인 관계와 혼인에 대한 권고, 돈에 대하여, 그리고 교회를 인도하는 자에 관한 사도 바울의 권면의 글이다.

 

“주는 나를 돕는 자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라는 주를 향한 견고한 신뢰가 글의 중심에 흐르고 있다.

주의 도우심, 주의 은혜는 빈 마음, 낮은 마음으로 흐른다.

 

주께서 피를 흘리시고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자신의 모든 권을 내려놓으시고, 그 빈 곳에 하나님의 것을 채우신 열매이다. *[빌2:5-8]

이 길을 따라가는, 자신의 권을 내려놓는 사도의 길을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읽을 수 있다.

 

‘은혜로 마음을 굳게 함’은 다른 교훈에 끌리지 않은 마음, 주의 은혜만을 기대하는 마음일 것이다.

이 마음은 교회를 인도하는 자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성도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마음이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 스스로 인도자의 자격을 세우는 자가 있을 수 없고, 스스로 얻은 성도의 신분으로 자랑할 자가 있을 수 없다.

 

사도에게 은혜가 필요하고 *[고전15:8-10] 성도에게 은혜가 필요하다.*[딤후1:9, 베드로후서 3:18]

 

이 은혜를 구하는 구체적인 삶의 형태는 이미 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다.

20230917은혜로 굳게 함Artist Name
00:00 / 48:08

선 줄로 생각하는 자/ 고전10:12-17/ 20230913

가시광선이라는 말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빛이 있으므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사람의 눈으로 모든 빛을 볼 수 없다.

사람의 귀로 모든 음파를 감지할 수 없다.

사람이 지각할 수 있는 범위는 만물의 일부분이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희로애락도 부분적이고 순간적이다.

 

그러나 만일 이렇게 일부분을 경험하고 일부분을 아는 인생이 스스로 전체를 아는 존재로 여긴다면 이 사람은 어두움에 속한 자이고 교만한 자이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빛'을 볼 수 없는 소경으로 태어났다. *[요1:5,10]

하나님의 복음은 영적 소경, 중풍병자, 문둥병자, 죽은 자들에게 들리는 영적 지식이다.

이 지식은 죽은 자를 살리는 지식이지 육체를 세우는 지식이 아니다.

 

이 지식에는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을 포함한다. *[전3:11, 잠25:3]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시71:15]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은 "붙잡힌 구원"을 증거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3:12]

 

"붙잡힌 구원"은 안전하지만, 만일 "붙잡은 구원"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는 놓칠까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워 놓은 구원"이 아니라 "붙잡아 주시고 섬겨주시는 구원"이다.

20230913선줄로생각하는자Artist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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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밝히 드러나는 삶/ 에베소서 5장/ 20230910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호6:3]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나를 아는 지식과 연결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새벽빛 같이 일관된 규례로 듣는 자의 마음을 적신다.

 

창세의 시작 둘째 날, 궁창 아래 물과 궁창 위의 물이 온 땅을 적시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법으로 여긴다면,

 

창세 셋째 날, 이 물의 세력이 집행되어 한곳으로 모인 결과, 뭍이 드러났고 드러난 땅에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과목이 자라게 되었다.

 

말씀으로 비추어진 마음의 어두움이 밝히 드러나면 그 마음에 맺히는 열매가 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만 있는 땅에 빛이 비취므로 비로소 혼돈이 혼돈으로, 공허가 공허로, 흑암이 흑암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여기는 마음에 길과 진리와 생명에 대한 소망이 함께 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5:8]

 

빛으로 드러난 것들은 더 이상 어두움이 아니라 빛에 속한 것이 된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엡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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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 노래/ 삼하1:17-27/ 20230906

‘활 노래’는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 내용의 노래이다.

 

사울과 요나단을 ‘용사’로 여기는 다윗은 그들의 병기인 방패와 칼과 활이 용사의 힘을 나타내지 못하고 망하게 됨을 슬퍼한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지만, 사울은 그 왕위를 스스로 지키려는 망상에 사로잡힌 길을 갔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고 다윗을 죽이려는 아버지 사울의 불의를 알지만, 사울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의 비극적인 죽음은  ‘야셀의 책’에 기록되었다. 야셀의 책은 ‘의로운 자의 책’이라는 뜻의 책이다.

 

두 사람의 죽음은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 영적 교훈을 전하여 주고 있다.


 

‘아말렉’은 진멸의 대상이지 선별의 대상이 아니다. *[출17:14,삼상15:3]

하나님께서 육체를 버리신 것처럼*[창6:3] 아말렉을 버리셨다.

사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과 함께하지 못하였다. *[삼상15:9]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잃은 사울은 자신이 자신을 지키는 방패로 살 수밖에 없었고, 이 사울의 방패는 대적의 화살을 막을 수 없다. *[엡6:16]

 

사울과 요나단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용사이고 병기였으나, 물러가*[시78:9] 전쟁의 날에 엎드러졌다.

 

이들을 향한 다윗의 슬픔은 오늘날 방패 잃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이 아닌가?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 6:13 ] 

20230906활노래Artist Name
00:00 / 54:08

바리새인들의 누룩/ 눅12:1-5/ 20230903

외식(外飾)은 겉을 보기 좋게 꾸미어 사람의 눈을 속이는 거짓된 행위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통렬(痛烈)하게 질타하시고 제자들에게도 경고하신다.

 

누룩은 부풀리는 세력이다.

하나님의 판단으로 0점인 인생이 100점인 줄 착각하고 산다면 누룩에 부풀려진 거짓된 존재이다.

 

“회칠한 무덤”은 ‘사망’을 생명이 있는 것처럼 꾸미는 바리새인의 형상을 지적한 말씀이다.

 

만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다”고 배우고 아는 예수의 제자가 암암리에 음식을 위하여 목숨을 거는 삶을 산다면 바리새인만큼 외식 되고 가증한 세력에 붙잡힌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가증한 누룩의 세력이 배양되는 곳이 어두움에 속한 인생의 마음과 생각이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람의 속이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데*[눅11:39], 바리새인의 눈으로 자신을 볼 때 자신은 세리와 창기와 같지 아니하였다.*[눅18:11]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눅11:34]

 

자신의 속을 볼 수 있는 시각이 온전하지 못한 자의 삶은 가식으로 열매 맺는다.

자신의 눈에 들보가 있는 줄 모르는 자의 마음에 누룩의 세력은 충만하다.

 

하나님의 사역은 모든 사람을 이 악한 세력에서 이끌어내시는 일이시다.

 

성경은 ‘천지(天地)’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다.

땅이 보여야 하늘이 보인다.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시각을 얻은 자가 땅을 볼 수 있다.

 

바로와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밝히 보인 자에게 유월절 어린양이 뚜렷이 보인다.

유월절은 무교절의 시작이다.

20230903바리새인의누룩Artist Name
00:00 / 51:03

영원한 제사/ 히10:12-14/ 20230830

한 사람의 '모든 죄'의 범위를 정한다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범한 죄악된 활동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성경적 규정은 훨씬 단순하다.

그것은 첫 사람 아담 안에 속한 모든 것이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잃은 아들, 죽은 아들'*[눅15:32]인 것처럼, 하나님을 잃은 아담은 사망의 영역에 갇혀서 악취를 뿜어내는 무덤 안의 존재이다.

 

그러나 이 무덤까지 이른 예수께서*[벧전4:6] 첫 사람 아담의 몸을 벗으시고 새 몸을 입으셨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10:12-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는 세상 죄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대속의 능력이다.

 

'영원한 제사'는 영속(永贖)*[단9:24]의 의미와 함께 '완수(完遂)와 새 영역으로의 도약(跳躍)'*[히9:26]을 표한다.

 

사람이 "거룩하게 되었다,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는 말은 이 세상에 속한 자를 설명하는 용어가 아니다.

'영원한 제사'와 함께한 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부활에 참여하는 자를 설명하는 말이다.

20230830영원한제사Artist Name
00:00 / 47:17

잃어버린 안식과 회복/ 마11:28/ 20230827

성경은 첫 사람 아담이 잃어버린 안식을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하여 주신 일을 증거하고 있다. *[창3:17-19, 마11:28, 12:8]

 

아담의 불순종은 이 세상으로 하여금 안식 없는 곳이 되게 하였다.

사람들은 안식이 없는 곳에서 안식을 구하고, 안식하 수 없는 방법으로 안식을 구하는 수고와 고통의 현장에 갇혀 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 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시107:10-12]

 

고된 수고는 탄식을 낳고 수고와 탄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수고는 더 무거운 수고와 더 깊은 탄식과 공허를 낳는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 *[히11:3]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명하여 주기 위한 잠시 세계이다.

 

첫째 아담 안의 모든 수고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따라 가는 결과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회개(悔改)는 회전(回轉)의 동작과 함께 한다.

 

예수께서 회개치 아니하는 고을,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을 저주하셨다.

그리고 "내게로 오라!"는 말씀으로 이들의 지혜와 슬기가 아닌 다른 안식의 방향을 제시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좇은 결과가 안식을 잃은 것이면, 안식을 회복하는 방향은 이미 결정되어 있고 그 말씀의 방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조준되어 있다.

 

예수께로 가는 일은 예수의 멍에를 함께 메는 일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6:3-5]

 

예수와 멍에를 함께 메는 일은 예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에 함께하는 일이고 안식에 참여하는 일이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4:10]

 

몸이 피곤할 때 침대가 안식처가 될 수 있고, 빚쟁이에게 탕감이 안식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죄인에게는 십자가 그늘이 안식처가 된다.

20230827잃어버린안식과회복Artist Name
00:00 / 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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