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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10:10-18 20230108

이 세상 기독교인들 중에 성도의 삶이 "성화(聖化)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 말은 "거룩함을 얻었다"는 말씀과 대치될 뿐만아니라 자기를 거룩히 구별한 언약의 피를 거룩하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며 은혜의 성령을 욕하는 자의 허언(虛言)이다.

 

히브리서 10장 10절 말씀인 "거룩함을 얻었다"는 완료된 결과의 기록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총체적 사역의 결과이고, 이 사실이 믿어진 사람의 마음에 맺혀진 하나님의 권능이며 구원의 확증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함께한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스려진 결과이고 성령의 인(印) 치심으로 "거룩함"을 얻고 누리는 세계이다.

 

하나님께서 거룩케 하시고,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세계를 누리게 하신다.

결코 사람의 의지나 수고가 요구되는 세계가 아니다. 도리어 사람의 의지나 수고가 거세된 곳에서 얻고 누릴 수 있는 세계이다.

 

양자(養子) 입양이 확정되었는데(롬8:15, 갈4:6), 여전히 양자가 되려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이는 정신과 진단이 필요한 상황이다.

거룩하게 된 자가 거룩하려고 노력한다면 거룩한 자가 아니다.

 

온 몸이 깨끗한(거룩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의 사역은(요13:) 그 거룩함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허구의 세력을 씻어주시는 사역이 아닌가?

 

만일 그 허구의 세력이 씻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거룩하게 되려 하고 "성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십자가의 원수(빌3:18)이다.

 

오리 사이에 태어난 백조가 어느날 자신이 백조인 사실을 알게되었다면 이 백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백조가 백조 되려는 수고가 아니라 하늘을 날고 있는 백조들과 함께하는 일이 아닌가?

20230108거룩함을얻었노라Artist Name
00:00 / 42:58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눅13:1-9 20230104

사람들이 예수께 한 가지 이슈를 가지고 물어 왔다.

빌라도의 제사에 제물이 된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 이방인에게 정복 당한 고통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이런 참담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묻는 물음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해 받은 자나 해 받지 아니한 자의 죄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회개치 아니함을 인한 결과"임을 밝히셨다.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한다면, 물과 거름을 잘 주어야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기능을 회복해야 할 문제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모든 일의 시작과 결과를 하나님의 통치로 받아드려야 마땅하다.(요1:3,대상29:11-12)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이 본질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와 방향을 상실하였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당시 이스라엘를 암시하고 있다.

 

아담 안의 모든 인생이 바라고 원하는 방향이 '동(東)'이라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준비하신 세계는 '서(西)'에 있다.

방향을 잃은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노를 젓는 수고가 아니라 방향을 잡는 일이다.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준비하신 하나님의 표적이며 안식이며 실체이다.(요6:26,눅2:25-32)

그러나 이 백성의 눈은 가리었고(사6:9, 마13:14)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는 그들의 바라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나 하나님을 잃어버린 백성의 길을 가고 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모습이 아닌가?

 

이 패역한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고 예수께서는 "회개하라"고 하신다.

20230104열매맞지못하는Artist Name
00:00 / 45:26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 마4:4 20230101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실 때,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다.

 

시험하는 자, 마귀에 대하여 예수께서 나타내신 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께서 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덮어 물리치며 그 능력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한가지 사실은 마귀도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였다는 점이다.

사단이 '광명의 천사'(고후11:14)로 가장하는 것처럼, 마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며 자기 일을 한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라는 의미보다도, 기록된 말씀 속의 일관되고 총체적인 '구원의 메시지'를 의미한다.

 

'예수'의 헬라어 '이에수스'는 히브리어 '예호슈아'이다.

'예호슈아'는 '예호바'와 '야솨'의 합성어이고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응축된 표현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5:39]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말씀이다.

만일 말씀의 방향이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말씀을 빙자한 거짓 세력의 농간이다.

 

오늘도 이 거짓 세력은 인생의 원욕(原欲)에 실려 나타난다.(요일2:16, 약1:15)

이 마귀의 사역을 허구의 세력으로 처리해 주는 유일한 힘은 여전히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6:54,55]

20230101모든말씀으로Artist Name
00:00 / 41:48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눅19:1-10 20221228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오심이다.

내가 예수의 구원에 이끌린 그리스도인이라면, '잃어버려진 나'와  '나와 함께하는 예수'라는 두가지 증거가 있는 자이다.

 

뽕나무에 달린 삭개오는 예수께서 보시기에 '잃어버린 자'이었다.

삭개오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가?

 

피조된 존재가 창조주를 없는 것으로 여기고 산다면 창조주 없는 피조물이다.

그리고 설령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거스리는 삶을 산다면 역시 하나님을 버린 존재가 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거스린다. (롬8:7)

인생의 '육체'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려진 물건이다. (창6:3)

더욱 저주스러운 일은 그 버려진 육체를 섬기는 삶이다.

그리고 더 더욱 저주스런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존재인 줄도 모르는 삶이다. (전12:1,7)

 

삭개오 마음의 중심에 '돈'의 세력이 있었다.

한 평생 돈을 따라간 인생이었지만, 그 세력이 삭개오를 만족케 하지 못하였다.

결국 삭개오의 마음에 찾아 온 '혼돈과 공허'는 삭개오로 하여금 뽕나무에 올라가게 하였다.

비로소 삭개오는 예수 앞에 '잃어버린 자'로 발견되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말씀은 육체뿐인 인생, 잃어버린 자를 찾으신 예수의 음성이다.

삭개오의 마음 중심에 돈의 세력을 이기는 예수의 세력이 임하였다.

20221228내가오늘네집에Artist Name
00:00 / 39:44

나그네 백성의 묘지/ 창23: 20221225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 앞에 슬퍼하며 애통하였다. 그리고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헷 족속과 교계(較計)하여 그들의 밭과 굴을 자신의 소유 매장지로 얻는다.

 

이 매장지는 이 땅 거민들에게 인증된, 그리고 구별된 나그네 백성(히11:13)의 유일한 소유 묘지이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대상29:15]

 

이 다윗의 기도 속의 열조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간 나그네들이다.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레아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몸을 묻었다.

야곱도 멀리 애굽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이 곳 조부의 소유 매장지까지 메어다가 장사(葬事)를 지내었다.

이 묘지는 나그네 백성들이 이 세상에 잠기 머물다 입고 있던 몸을 벗어 놓고 간 묘지일찐데, 탈의실과 같은 환승 정거장이 아니겠는가?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히11:22]

 

요셉은 400년이 지난 후 그의 믿음을 따라 자신의 해골이 아버지 야곱의 묻힌 곳에 함께 묻혀진다.

 

나그네 백성의 죽음은 본향으로 옳겨지는 통로이다.

 

그리스도인이 나그네의 삶을 마칠 때 하나님께서 준비한 묘지가 있다.

예수를 판 댓가로 받은 가룟 유다의 은 삼십량은 결국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만드는 데 쓰인다. '아겔다마'(행1:19), '피밭'이다.

 

예수의 피를 힘 입어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예수의 피값으로 준비된 '나그네의 묘지'도 이 세상을 잠시 머물다 가는 성도들을 위해 베푸신 '피의 약속'이 아니겠는가?

20221225나그네묘지Artist Name
00:00 / 43:56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 창4:8-12 20221221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 [창3:17-19]

 

이 아담에게 임한 하나님의 저주는 가인과 아벨에게도, 모든 인생에게 임하였다.

이 확정된 저주의 '땅'은 아담의 출처(出處)이고 소속(所屬)이고 귀착점(歸着点)이다.

아담과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의 전부인 이 저주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없다.

 

이 저주 가운데 있는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은 먼저 '사망 안에 있는 인생'인 줄 알게 하시는 일이고, 알게 된 자들을 위하여 베푸시는 은혜와 구원의 사역이다.

 

벌거벗은 아담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은혜와 구원은 '가죽 옷'이었다.

그리고 동일한 저주 가운데 있는 가인과 아벨을 위하여는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의 제물인 '선(善)한 제사'가 제시되었다.

 

가인이 이 '선(善)한 제사'에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은 '땅의 소산'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을 무시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자기 제사'에 대한 고집과 그의 분노는 결국 아벨을 죽였다.

이는 저주 받은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상황의 현현(顯現)이다.

그리고 자기가 자신을 찌르는 정죄(定罪)의 고통과 이 해결될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의 길을 걷는다.

이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와 대조된 삶은 "땅을 정복하는 삶"일 것이다. (창1:28)

그러나 아담은 이 "땅을 정복하는 삶"을 잃어 버렸다.

결과는 도리어 "땅의 세력에 정복 당하는 삶"이 되었다.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는 삶'(레26:17)은 땅에 속한, 하나님 없는 인생의 전부이다.

결국 인생은 무덤과 무덤 사이를 가는 존재가 아닌가? (막5:2)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5:28]

20221221땅에서피하여Artist Name
00:00 / 43:21

탐심은 우상 숭배/ 골3:1-6 20221218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출20:3]

 

돌판에 새겨진 계명의 시작은 이미 모든 인생의 정체를 드러내고 심판한다.

이 계명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지는 '자의적 숭배'(골2:23)의 본능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사1:4) 인생의 패역을 드러낸다.

 

'대체의학(代替醫學)'이라는 치료법이 있다.

기존 의학적 치료법에서 답을 얻지 못하여 생겨난 의술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각도(刻刀)로 새겨 만든 금송아지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백성이 스스로 만들어 낸 ‘대체 하나님’이다. (출32:1-4)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일은 3,500년 전 시내산 밑에서 벌어진 사건이 전부는 아니다.

자기의 입맛에 맞는 하나님, 납득할 만한 하나님, 스스로 섬길 만한 하나님……, 사람의 생각 속에서 다듬어지고 만들어지는 상황은오늘날 육체를 따라가는 모든 인생의 마음에 저절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창3:)

거듭난 기독교인이라도 육신의 생각에 휘돌린다면 이 현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성경은 이 '대체 하나님'이 만들어지는 원인을 자세히 설명하여 준다. (롬1:21-23, 골3:1-6)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3:5]

20221218탐심은우상숭배Artist Name
00:00 / 42:09

살구나무와 끓는 가마/ 렘1:11-14 20221214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면서 보여 주신 두가지는 '살구나무'와 '끓는 가마'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패역한 이스라엘에게 준비된 재앙인 "끓는 가마"는 이미 기울어졌다.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보았고 이 어린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재앙의 날을 고하여야만 한다.

 

'살구나무'의 원어 어원에서 "깨어 지킨다"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지켜주셔야 하였고, '살구나무'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울 고하는 선지자의 입을 지켜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게 하였다.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왕상17:1)는 엘리야의 말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야 하기에 엘리야를 공궤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을 하는 자의 입을 하나님이 지키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믿어진 마음에 하나님의 저주와 구원이 새겨져 있다.

이 저주와 구원을 전하는 입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

20221214살구나무Artist Name
00:00 / 46:53

귀에 응하였느니라/ 눅4:16-22 20221211

예수께서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어 자기를 증거하셨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하신다는 은혜의 복음을 전하셨다.

그리고 책을 덮고 말씀하셨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리라."

 

'응하다'는 말은 헬라어 '플레로오', '가득차게 하다'는 뜻으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고 완성되었다는 의미을 전한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의 귀에 들린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는 응하지 못하였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고 있으나 회당 안의 듣는 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여길 수 없었다.

 

이 예수의 증거는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 슬퍼하는 자'들에게 들리는 은혜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61:3]

20221211귀에응하였느니라Artist Name
00:00 / 43:09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 히10:19-22 20221207

기독교 안에도 많은 교단과 종파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 속에서 경험되고 만들어진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리라.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사48:1)에게 하나님이 제시한 '새 일'이 있다. (사48:6, 사 43:19, 렘 31:22)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였던(벧전1:12) 이 '새 일'은 사람의 수고와 노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성소의 휘장을 찢어열어 놓은 '새 세상'이다.

이 복음에 함께하는 자는 삶의 시작과 중심이 자기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로 옮겨진 자들이다. (갈2:20)

 

이들은 중심이 하나이기에 나뉘어질 수 없고(롬8:35) 항상 주의 행하실 '새 일'에 함께한다. (고후4:16)

 

하나님께서 이루신 이 구원의 복음은 사람의 기억이 주소지가 될 수 없고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다.

구원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고 그 길을 걷는 자들의 세상이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3:12]

20221207새롭고산길Artist Name
00:00 / 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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