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녹 城/ 창4:16-17 20221116
가인의 선택은 여호와를 떠나 아들의 성 '에녹'을 쌓는 일이었다.
이 선택은 하나님께서 가인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의 '표'에 대한 거절이다.
가인은 하나님이 제시한 약속이 자신을 지켜주는 城이 될 수 없어서 '자신이 자신을 지키는 삶의 城'을 쌓았고,
이 성을 의지하는 삶의 결과는 '생존을 위한 싸움'이 전부가 되었다. (창4:24)
여호와 하나님은 '존재와 힘', '생명'(요1:4)의 시작이시다.
그러나 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인생은 '생존'이라는 자생된 굴레에 갇히게 된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렘2:13]
하나님에 대한 두가지 악은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에녹 城은 하나님을 버린 인생이 스스로 쌓은 城이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이 성이 무너지면 하나님이 그를 위한 山城이 되신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나훔 1:7]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城을 쌓는 데 실패한 자, 소외된 자, 버려진 자, 더 이상 성을 쌓을 소망을 잃은 자들을 찾아 함께 하시고 그들의 성이 되어 주셨다.
헵시바와 쁄라/ 사62:1-5 20221113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 "결혼한 여자"라는 뜻의 이름인 '헵시바와 쁄라'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백성의 별칭(別稱)이다.
헵시바와 쁄라의 본래 호칭은 "버리운 자", "황무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온의 공의와 예루살렘의 구원을 밝히 나타내시고 성취하신 결과, 그 영광의 광채는 아름다운 면류관과 왕관으로 나타났고 그 은총을 입은 자를 '헵시바, 뿔라'로 불러 주신다.
헵시바와 쁄라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나는 그 분과 결혼하였다"는 사실을 누리라고 주신 이름이다.
하나님이 주신 곡식을 '오직 추수한 자'가 먹고 그 식물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처럼(사62:8-9), 헵시바와 쁄라는 그 구원의 이름을 누리는 자의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희롱하는 능욕의 세력을 잠잠히 받아 주시고 이들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십자가에서 이루셨다.
이 가시 면류관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면류관이 되었고 시온에 세운 왕(시2:6)의 왕관이 되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엡2:8 2022110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예수의 말을 듣게 된 혈루증 앓는 여인(마9:20)이나, 소경 거지 바디매오(막10:46)나, 흉악한 귀신에 들린 딸을 인하여 예수께 나아온 가나안 여인(마15:22)의 마음에 형성된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되었다.
이 믿음은 '은혜'로 얻은 믿음이다.
이는 사람의 지혜, 이성, 총명으로 이해하고 납득하여 형성된 믿음이 아니다.
은혜로 얻은 믿음은 사람의 지혜와 분별이 무익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에 대한 '외경(畏敬)'과 함께 형성되는 믿음이다.(창15:6, 히11:7)
인생이 피할 수 없는 모든 병과 고통과 사망에 이르는 결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죄와 허물'을 설명하여 주는 그림자이다.
이 죄와 허물, 사망에 대한 인식은 인생으로 하여금 창조주를 기억하게 한다. (전12:1,7)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육체를 신뢰하는 자의 마음에 형성될 수 없다.
만일 사람의 지혜와 경험을 근거로 이해하고 납득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 안에 갇힌 하나님이다.
혈루증 앓는 여인, 바디매오, 가나안 여인의 마음에 얻은 믿음은 인간적인 지혜와 수단과 기대가 끝이 난 곳, 사람의 생각 밖에서 공급된 믿음이다.
더 큰 은사, 제일 좋은 길/ 고전12:31 20221106
은사(恩賜, Spiritual gift, cavrisma; charisma)는 같은 성령으로 교회 안의 각 지체에게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약1:17)이고 섬김의 구체적인 실현이다.
더욱 '큰 은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일이고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고 '제일 좋은 길'은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4:16]
이 사랑은 인생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사랑을 입는 자들의 마음에 사랑할 수 있는 힘이 형성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입은 아들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
만일 아들의 마음에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사랑하려는 인위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자신에 대하여 어떠하였는가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은 옮은 자를 위한 사역이 아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하여, 지금 자신을 능욕하고 못을 박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0]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 크고 뚜렷하면 그 사랑도 크고 뚜렷하리라.
영혼이 잘 됨같이/ 요삼1:1-4 20221102
"영혼이 잘 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젊은 시절의 아브람을 떠나 말씀에 이끌리는 아브라함의 세계에 이르게 하셨다.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창24:1]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된 삶의 결과는 범사에 복을 누리는 삶이었다.
이 아브라함의 삶을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삶"이라고 설명할 수 있지 않은가?
요한삼서 3절에 기록된 것처럼,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를 증거하며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이 "영혼이 잘 된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막5:34]
혈루의 근원을 말려 버리신 예수께서 혈루병에 고통하는 여인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그를 건강케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구원은 죄와 욕망에 매여 살던 우리 영혼을 이끌어 큰 평안과 영원한 건강을 누리게 하신 일이다.
악한 세대/ 마12:43-45 20221030
더러운 귀신(부정한 영)이 사람에게서 나와 쉴 곳(물이 없는 곳)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있던 곳으로 돌아 와 보니 집이비고 소제되고 꾸며져 있었다.
새로이 단장된 집은 더 더러운 귀신 일곱을 용납할 만큼 심히 악한 처소가 되었다.
예수께서 성경에 예고된 표적을 나타내시며 유대 땅에 오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 없었다.
'표적되신 예수(요6:26)'에게 다른 표적을 구하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무늬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꾸며진 가증한 종교 집단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러운 여덟 귀신을 품고 사는 악한 세대는 겉과 속이 다른, 선한 모양으로 꾸며진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집단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더러운 귀신, 부정한 영, 죄의 세력이 나타나는 유일한 통로는 사람의 생각이고, 더 더럽고 가증한 세력이 찾는 곳은 선한 외모와 규모에 집착하는 종교 세력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눅11:39]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12:34]
겉을 선한 모양으로 꾸미는 것은 죄 가운데 태어난 모든 인생의 본능이다.(유1:10)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본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이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일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모양을 내는 일은 그 방향이 다르다.
하나님 앞에 최악은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다.
귀인과 왕/ 눅19:11-14 20221026
왕국(王國)의 백성들을 향하여 귀인(貴人)과 왕(王)과의 신분은 많이 다르다.
그러나 지금 백성에게 귀인의 신분일찌라도 이후 왕권를 얻어 돌아올 자라면, 그 귀인의 신분이 왕으로 옮겨지는 중이고 백성도 마땅히 왕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왕국은 왕의 나라이다.
입법과 사법과 통치가 왕의 결정에 따른다.
따라서 왕국의 백성은 왕에 종속(從屬)된 신분이다.
만일 백성이 왕을 선택한다면 그 나라는 더 이상 왕국이 아니라 공화국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였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단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계명에 속한 무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막7:6-9)
그러나 모사(謀士)이신 예수께서 3년 왕권의 완성된 결과를 십자가에 나타내셨다.
모두가 왕으로 여기지 않는 그 능욕의 자리가 그 모든 자들의 죄를 사하시는 왕권을 나타내는 자리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에게 왕이시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는 삶/ 롬15:1-3 20221023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는 삶은 하나님 교회 안에 힘이 있는 자의 권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아니하시고 도리어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을 받으신 것처럼, 강한 자의 힘은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연약한 자를 섬기는 일을 위하여 소용된다.
남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는 지혜와 힘은 인생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오르시기 전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드렸고(히5:7), 하나님의 함께하심과'순종'이라는 강한 힘을 얻으시고 십자가의 영광에 참여하셨다.
이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이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인생을 위해 이 땅에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오르게 하셨다.
이 아들에게 순종하여 함께하는 연약한 인생을 기뻐 받으신다.
하나님의 기쁨, 연약한 자의 기쁨을 위하여 사는 기쁨이 이 땅에서 누리는 강한 자 그리스도인이 삶이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 마5:22 20221019
만일 모든 인생에게 초능력이 있어서 화을 내기만 하면 그 화를 유발한 대상이 죽어버린다면, 인생은 순식간에 멸종될 것이다.
이러한 초능력이 인생에게 없지만, '노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와 같은 범죄로 규정하는 하나님의 법을 근거로 모든 인생은 이미 '살인자'요 '살인 당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 살인자를 향한다.
입법자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신4:24)
아무도 이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인생은 소멸의 현장에 있다.
이 율법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듣는 자로 하여금 소멸의 근원을 밝힌다.
자신이 지옥 불에 해당이 되는 자로 알게 되었다면 심판이 임한 마음이고 율법에 다스려진 마음이다.
그리고 이 소멸의 현장에서 들을 수 있는 하나님 아들의 음성이 있다. (요5:25)
빌레몬과 오네시모/ 몬1:6 20221016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에게 모종의 손해를 끼치고 도주하여 로마로 가 바울을 만나게 되었다.
바울은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골로새 교회에 있는 빌레몬에게 보내며 쓴 편지가 빌레몬서이다.
이전에는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무익하였으나 이제 교회 안에 모두에게 서로 유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귐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지극히 선한 목자 아래 믿음의 교제로 말미암음이다.
지극히 선한 일을 하신 예수를 아는 일은 그의 세계를 누릴 수 있는 힘을 공급한다.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의 시작과 과정이 어떠할찌라도 이 힘을 가진 교제는 그 결과가 선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도의 권위가 있지만 결코 스스로 일을 주관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선한 일이 억지로 되지 않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고 밝힌다.
'선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이고 '선한 일'은 예수께서 성취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