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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 성경 공부/ 요16 20211017

[보혜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거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대역으로 보혜사(保惠師, Advocate, Counselor, Helper) 진리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뚜렷한 분별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하고 아들의 권세를 누리게 하며 영생이 있는 삶을 산게 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가 되셨던 것처럼 오늘 하나님의 교회 안에 성령이 주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 성령의 일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증거하시고(요15:26) 믿는 자를 가르치시고(요일2:27)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시고(롬6:26) 독생자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로 함께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부족함 없는' 다윗의 만족(시23:1)을 누리게 한다.

 

강도 만난 자의 구원(눅10:)이 주막 주인의 보살핌으로보존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보혜사 성령의 보살핌과 함께 한다.

수요 성경 공부/ 시8 20211013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이 피조된 모든 것들을통하여 나타나 있다. (롬1:20)

 

헤아릴 수 없는 별의 세계를 통하여 더 크고 광대한 창조주의마음을 읽을 수 있고, 넓고 넓은 바다의 평안함에서 한없는 하나님의 평온을 읽어낼 수 있다.

 

이렇게 온 땅에 피조된 것들이 다름 아닌 '사람'을 생각하시고만드신 사실은 인생의 이해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역사이시다.

그러나 이 사실이 감지(感知)된 자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노래하는 권세가 주어진다.

 

이 노래는 인생의 경험이나 인위적인 수준의 감수성이 아니라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을 통해 받으시는 찬양이다.

 

모든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의 세계는 '예수'라는 이름과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통하여 열린 온 땅의 아름다움은 은혜를입은 자의 모든 시와 노래의 제목이 되었다.

일요 성경 공부/ 막7 20211010

[에바다]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제자들을 지적하고,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사람 안에서 나오는 더러움을 지적해 주신다.

 

그들은 사람의 계명,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덮는 삶을 산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고르반"으로 덮어 버렸다.

'고르반'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계명이다.

 

유대인의 귀에 하나님의 계명이 들렸으나 듣지 않고 어눌한 계명을 만들어 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인생의 마음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 요지이다.

이 계명에 다스려진 자가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을 개 취급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옳게 여겼다.

그리고 예수의 음성을 통해 큰 은혜를 얻게 되었다.

 

예수를 보고 들으면서 그리스도인 줄 알지 못하는 유대인은 귀먹고 어눌한 자들이다.

그들을 위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구하는 예수의 간절한 탄식이 "에바다!"이다.

수요 성경 공부/ 눅16 20211006

[거지 나사로와 부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는 부자와 나사로의 호화롭거나 거지와 같은 삶의 외면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마음에 형성된 '육체에 대한 지각과 대응'에 따른 두 가지 결과이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으로 호화롭게 육체가 가려진 삶을 살았고 나사로는 가릴 것이 없어 다 드러난 삶을 살았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여기는 자다.

그러나 육체를 벗으면서 아브라함과 나뉘어진 영역에서 영원한 고통에 참여한다.

 

부자의 표면적 삶의 형태는 아브라함에 속한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부자의 믿음과 그 결과는 아브라함에 속할 수 없었다.

부자의 믿음 안에 모세와 선지자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율례가 결여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모세와 선지자로 말미암은 믿음의 내용이 다를 수 없다.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듣지 아니한 부자의 마음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함께할 수 없다.

 

아브라함과 함께할 수 있는 나사로의 믿음은 어떻게 만들어진 세계인가?

그의 생명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에 연결되어 있었고 긍휼 외에 다른 소망은 없었다.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전9:4)

수요 성경 공부/ 살전1 20210915

[복음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

 

바울이 경험한 능욕과 환난은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을 누리게 한다.

바꾸어 말하면, 능욕과 환난 없는 구원의 삶은 이론적이고형식적인 상태로 흘러가 인위적 종교 활동에 머물 수밖에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복음에 이끌리는 모든 자에게 능욕과 환난은 준비되어 있다. (골1:24)

그렇다면 우리에겐 어떤 고난이 있고 경험되었는가?

 

바울이 빌립보에서 겪은 고난과 능욕과 같은 표면적인 상황은 다를지라도 내면적 상황의 고난은 오늘날 우리에게 동일한 세력으로 존재한다.

만일 우리가 바울처럼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큰 소망과 위로와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능욕과 환난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직 복음 안에 있는 분별과 감각과 지식의 결핍이 그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롬16:25-27)

일요 성경 공부/ 마16 2021091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예수는 하늘로서 오신 표적(요6:26, 35)인데, 바라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요구한다.

이들을 분별 없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지적하시고 경계하시면서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는 그들이 기다린 그리스도가 아니였고, 십자가의 예수는그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었다.

예수를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눅24:19)로 아는 제자들도 결국 십자가 예수를 뒤로하고 슬픈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떠난다.

 

표적을 보고 표적을 구하는 자들, 떡(예수)과 함께하지만 떡(예수)이 없는 줄로 여기고 걱정하는 제자들......, 그리고 예수를 믿는 모양은 다 갖추었지만 자기 생각을 따라가는 기독교신도들은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고전5:8)의 세력 아래 종교 활동을 하는 자들이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전5:7-8)

수요 성경 공부/ 마5 20210908

<천국 복음>

 

천국은 주인의 말씀을 듣고 얻을 수 있는 세계이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야 누릴 수 있는 세계이다.

 

왕으로 오신 분이 자기에게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천국 백성의 신분과 누리는 삶의 규례를 선포하셨다.

 

말씀하신 내용은 그리스도의 형상과 그와 함께하는 자들의 학습된 삶이다.

 

소금이 단맛을 내면 소금이 아니고 설탕이다.

소금은 짠맛을 낸다. 짠맛을 내지 못하면 소금이 아니다.

사람이 소금과 같은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다면, 짠맛만을 내는 존재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가르치신다.

 

이미 백체(百體)가 지옥에 속한 존재가 그 사실을 모르고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다면, 이런 상태를 '짠맛을 잃은 소금'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은가?

 

'소금과 빛'은 지옥에 속한 자가 천국 백성이 된, 우리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두 형상을 설명하여 준다.

'소금'인 줄 알게된 심령에게 천국(빛)이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21)

 

오늘 우리가 누리기에 충분한 세계이다.

천국은 듣고 믿어 누리는 세계, 지금 심령으로 배워 누리는 세계이다.

지금 누릴 천국이 없는 자에게는 이후에 누릴 천국도 없다.

일요 성경 공부/ 창27:46 20210905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둘째 아들 야곱의 아내도 헷 사람의 딸 중에서 취하면, "나의 삶은 의미 없다!"라는 리브가의 탄식은 오늘 우리그리스도인과 그 삶의 질(質)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으로들려진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고 그를 얻기 위하여 14년의 노고를 수일 같이 여기며 살았다. 그러나 라헬을 향한 사랑과그 삶의 질(質)은 빼앗길 만한 것이었다.

 

-내가 모압을 재미 없는 그릇 같이 깨뜨렸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48:38)

 

하나님은 모압을 재미 없는 그릇 같이 깨뜨린 것처럼 야곱의 즐거움을 깨뜨리시고 다른 질의 즐거움을 누리게하셨다.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히고 약속을 이루시는 벧엘의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두는 야곱의 삶은 얍복강을 건너기 이전의 야곱의 즐거움과 그 질이 전혀 다르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8:56 )

일요 성경 공부/ 시1 20210606

<복 있는 사람>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肉膳)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7:1)

 

하나님의 福은 물질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의 생각과 계획은 물질적인 풍요에 복의 근거를 두고 있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의 사상은 자기 입맛에 맞는 세상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요 8:44) 하나님의율례를 거부한다.

이들의 꾀와 길과 자리를 거부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은 인생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시편 1편 1-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모습도.......

이 분별이 뚜렷한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고 준비된 복을 누릴 수 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9:26, 호1:10)

수요 성경 공부/ 눅10 20210609

<영생/ 자비를 베푼 자의 길>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길과 자비를 베푼 자와 함께하는 길, 이 두 가지 길은 영생을 구하는 율법사에게 예수께서 제시한 답이다.

 

이 땅에 붙어 사는 인생 중에 첫 번째 길을 갈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러나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율법사'는 이 첫 번째 길에서 영생을 구하는 삶을 살려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는 길'과 '강도'와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 두 번째 길인 '자비를 베푼 자와 함께하는 길'로 율법사를 이끄신다.

 

육체로 하나님을 섬겨 보려는 시도가 '인위적 종교 활동'이라면, 이 첫 번째 길에서 파산한 영혼이 비로소 구하고 얻고 누릴 수 있는 세계가 두 번째 길인 '자비를 베푼 자와 함께하는 길'이다.

 

영생은 이 길을 걷는 삶이다.

능동적 성취의 세계가 아니라 '피(被)섬김'을 받고 누리는 세계이다.

수요 성경 공부/ 요21 20210602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漁夫를 불러 使徒로 삼으신 예수께서 베드로를 향한 일관된 주문은 "너는 나를 따르라!"이었다.

 

벳세다 바닷가를 떠나 예수를 따르는 3년의 시간 속에 베드로는 스스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막10:28) 여겼으나 예수와 함께할 수 없는, '버리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 '버리지 못한' 것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가려는 삶이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는 베드로의 외침 속에 있는 그의 종교성은 예수와 함께할 수 없는 육에 속한 세력이다.

 

그러나 이 베드로의 외침을 공허한 소리로 만들어버린 예수는 결국 베드로를 팔 벌리게 하시고 말씀을 품고 예수를 따라가는 삶을 누리게 하셨다.

일요 성경 공부/ 요5 20210530

<양문 곁 베데스다>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양을 잡는 규례를 모르는 유대인은 없을 것이다.

 

로마의 압제 아래, 고통 가운데 메시아의 출현을 고대하는 시기이었지만, 유대땅에 있는 많은 병자들이 소망을 두고 있는 곳은 베데스다 못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성의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천사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

 

그 곳에 오신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 중에 38년 된 병자를 택하시고 일으켜 세워 주셨다.

 

성경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대하여 파산한 자기 백성(요1:11)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유월절 어린양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 유대 백성의 이야기이다. 오늘날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양에 관한 하나님의 규례에는 생명을 얻는 약속이 있다. 천사와 베데스다의 전설 같은 요행의 세계가 아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소망에 목숨을 걸고 살다가 결국 절망을 회복(?)한 한 사람, 베데스다에 대하여도 절망한 38년 된 병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수요 성경 공부/ 요11 20210526

<살아서 믿는 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라는말씀 속에 담긴 예수의 기대는 '살아서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십자가의 예수가 우리 마음에서 부활되지 못한다면 십자가를 통해 제시된 하나님의 메시지는 공허한 전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그 부활의 세력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고, 대적자들을 즐겁게 하며, 예수로 하여금 탄식케하는 삶을 사는 자가 된다.

 

부활의 세력을 나타내는 일은 아담 안에서 만들어지고 굳어진 기준을 깨고 나오는 일이고, 이 아담 안에 충만한 사망의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의 말을 듣는 일이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는 말씀을 듣는 자가 말씀과 형편의 차이를 무시하고 '죽을 병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삶을 산다면 '살아서 믿는자'가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누리는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살아서 믿는 것'이다.

바울의 빌립보서 3장의 간증은 구체적인 삶의 내용과 방향을 제시해 준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3:10-1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행함' 곧 살아서 믿는 삶이다.

일요 성경 공부/ 막5 20210509

<거라사인 지방 사람들>

 

예수께서 거라사인 지방에 오셔서 하신 일의 결과는 그 지방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놓으신 일이다.

한 부류는 귀신 들려 있다가 온전케 되어 예수와 함께하는 자이고, 다른 한 부류는 예수가 그 지경에서 떠나주기는 원하는 사람들이다.

 

이 상황은 오늘날 이 세상에서 여전하다.

 

원래 거라사인 지방과 그 곳에 거하는 모든 자들은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었으나, 예수가 그 땅을 밟으심으로 상관이 있는 자와 여전히 상관이 없는 자로 나뉘어진 것처럼, 지금 이 세상도 그러하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 2:12)

 

오늘 우리는 거라사인 지방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헤아려 볼 수 있다.

수요 성경 공부/ 빌2:5-8 20210505

<예수의 마음>

 

유대인의 왕을 찾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들으면서 헤롯이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을 수 있었다면, 동방박사들과 함께 아기 예수께 경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롯은 자기의 왕위를 스스로 지키고 세우는 쪽을 선택하였다.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나신다는(마 2:6)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지만 말씀이 그를 이끌지 못하였다. 결국 헤롯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죽이는 잔행을 저지른다.

 

그러나 이러한 헤롯과는 다르게 동방박사의 선택은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는 쪽이 아니었다. 낯선 타국 유대 땅에서, 게다가  유대 왕궁의 왕좌에 앉아 있는 왕에게 “유대 왕이 어디 계시뇨?”라고 묻는 행위는 인생의 영역에서 벗어나 다른 세력에 이끌리는 마음의 소산이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히11:8) 이 동방박사가 이끌림을 받는 세계는 이미 그들의 마음에 얻은 믿음을 따라간 결과이다.

 

헤롯도 유대인이고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말씀에 이끌림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왕’의 위치에서 내려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헤롯이 자신의 소행을 깨닫고 자신이 죽인 예수가 자신의 모든 불의를 담당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그 마음에 살아난다면, 이는 예수의 마음과 접촉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그려내는 주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의 마음을 품은 마음에 온전히 이루어진다.

나를 섬겨 주신 주의 마음은 나로 하여금 마음을 비우게 하고 말씀에 순종케하며 예수님처럼 남을 섬기는 삶을 살게 한다.

일요 성경 공부/ 눅16:9/ 20210502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 난해한 주님의 요구 앞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우리의 기준과 셈법을 내려놓는 일이다.

그리고 지혜가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다니엘의 분별에 함께하는 마음으로 성경 속에 이미 있을 답을 구한다.

 

말씀이 제공한 키워드는 ‘영원한 처소’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 속에서 “역시, 오직 예수”라는 답을 얻어낼 수 있다.

 

친구가 예수라면 ‘불의의 재물’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는 그리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다.

피조된 만물 중에 유일하게 죄를 짓는 존재는 인간이다.

‘不’는 ‘罪’의 다른 이름 중 하나이다. (요일 5:17)

그리고 이 不, 옳지 않은 것들은 예수와의 만남과 사귐에 필요한 결정적인 조건들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벧전 3:18, 롬 3:5, 요일 5:17,요일1:6-10)

 

불의한 것을 불의한 것으로 여기는 삶은 하나님의 의를 견고히 누리게 한다.

불의의 주체는 육체이고, 육체가 할 수 있는 일은 죄를 짓는 일이고(갈5:19-21), 육체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는 가증한 종교활동이기 때문이다(갈3:10).

수요 성경 공부/ 마6:24-34/ 20210428

<財神/ 맘몬mammon>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경험되는 의식주에 대한 ‘염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상실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고, 이 염려는 무엇이 귀하고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분별을 잃게하고 결국 재물에 휘둘리는 삶의 공허와 고통을 맛보게 한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財神을 섬기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삶의 ‘염려’가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과 분별로 온전히 제어되어 방향을 얻지 못한다면, 마음의 원함을 따라 만들어 낸’ 하나님’아라는 이름의 ‘재신’을 섬기는 자가 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결정에 대하여 불행하게도 인생의 마음에 있는 재물에 끌리는 자력(磁力)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 현상에 대한 하나님의 해법인 ‘그의 나라와 의’를 얻어 누리지 못한다면, 그에게 있어서 재물은 신이 된다.

일요 성경 공부/ 시2/ 20210425

<시편 2편/ 열방을 유업으로>

시편 이편 속의 열방은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한다.
하나님의 권세 아래의 예속(隷屬)을 거부하는 이 대적자의 구체적인 형상은 시편 일편에 잘 그려져 있다.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 머물기를 원하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존재이다.
하나님이 세운 왕을 원치 않는 이 열방에 대하여 하나님의 결정은 단호하다.

“내가 나의 왕을 이미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그리고 하나님은 독생자 왕이 감당하여야 할 사명을 제시한다.

“열방을 네 유업으로, 땅 끝 지경을 네 소유물로 주리라!”

열방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매순간 인생의 육신에서 형성되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좇는 삶(엡2:3)이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요 열방이 아니겠는가?

결국 열방은 유업으로 삼은 왕에 의하여 철저하게 다스려 진다.
그의 철장에 다스려진 심령은 지혜와 교훈을 얻는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열방은 하나님이 세운 왕에게 붙잡혀 그의 소유된 백성의 삶을 누린다.

자신의 육신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열방의 세력이 있는 줄 알게 된 인생에게는 참으로 기묘하고 놀랍고 감사한 일이다.

수요 성경 공부/ 시133/ 20210421

<형제 연합>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곳은 하나님의 교회이다.

교회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리 -> 아론 -> 수염 -> 옷깃에 임하는 보배로운 기름과

헐몬 -> 시온의 산들에 내리는 이슬과도 같이 하나님의 교회에 임하는 성령의 역사는 영생의 복을 누리게 하는 위로부터 오는 세력이다.

 

이 세력에 이끌리는 모임은 이미 연합된 상태이고 함께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 연합은 온전하고 영원하다.

 

그러니까 형제의 연합은 원하고 노력하는 사람에 의해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연합하려는 의지나 수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복을 누리는 데 마음을 모으는 지혜가 필요하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벧전1:22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4:10 )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일4:12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4:20 )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일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임한 마음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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