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7:37-39 20230521
유월절은 유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명절이다.
그날,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장에 바르고 양 고기를 먹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는 7일은, 애굽의 온 천지가 호곡으로 진동하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자기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여 내신 하나님께서 이 유월절을 기념하는 일은 성경의 중심을 흐르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대속의 메시지이다.
1,500년이 지난 후, 유월절이 가까운 어느 날, 예수 앞으로 큰 무리가 모였다.
예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행하신 표적을 보고"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하나, 실상은 억지로 임금 삼으로는 자들이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렘2:13]
유월절은 어린 양을 먹으며 대속의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그러나 유대 백성들의 마음에 예수가 유월절 어린 양으로 담겨질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나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말씀을 외쳐 더하셨다.
생수의 강,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회복한 자의 믿음의 열매이다.
이 구원의 믿음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다.
없는 곳에서 있는 곳으로의 환승(換乘)이고 죽은 자가 생명을 얻고 누리는 환생(還生)의 능력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4:10]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는*[고전6:13] 썩어질 굴레와 목마름에서 벗어날 수 없던 인생이 생수를 마시고 생수를 주신 주를 증거하는 삶을 산다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는 삶을 사는 자가 아니겠는가?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 시편 107편 노트 20230517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여호와의 인자와 기이한 일을 경험하고 찬송하는 자들이다.
여호와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들은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고, 샘이 마른 땅이 되고, 옥토가 염밭이 되게 하신 일이다.
그리고 다시 광야를 변하여 못으로, 마른 땅을 샘물로 변케 하신 기이한 일로 주린 자를 먹이셨다.
이 기이한 일은 구속함을 입은 자들의 간증이고 구속의 증거이다.
말씀을 거역하고 멸시한 인생은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의 쇠사슬에 매인 삶에 머문다.
그리고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는 절망은 비로소 '여호와를 찾는 탄식'을 만들어 낸다.
이 탄식을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인자와 기이한 구원을 나타내신다.
결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게 하는 심판의 놋문을 깨뜨리시고 열지 못하게 하던 쇠 빗장을 꺾으셔서 구원의 문을 여셨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3:17]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눅5:27-28 20230514
예수의 제자 중 대략 절반은 어부이든지 벳새다(어부의 마을) 사람으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나머지는 레위라고도 하는 마태만이 직업이 분명하다.
예수님 앞에 세상 사람의 직업이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하겠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이다. *[고전1:26-29]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이 '것들'에 속하는 일은 저주이다.
그래서 이 '것들'에 속하지 않으려는 수고와 노력이 삶의 전부가 아니겠는가?
세관이 앉은 마태는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나를 좇으라"는 예수의 음성을 들었고 세관에서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
세상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세관에 앉은 마태의 모습이 전부이겠지만, 처음이요 나중인 분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 속에 있는, 세관에서 일어나 예수를 좇는 마태를 보셨다.
예수의 시각은 마태의 장래사가 아니라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믿음'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세상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모든 것'이 제자들의 그물과 배와 가족과 직업이겠지만, 하나님의 시각은 그렇지 않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고 또 목숨까지 버릴 마음으로 예수를 좇았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못한 제자들인 것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한 자는 버리지 못한 그것으로 인하여 예수를 좇을 수 없게 된다.
예수께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을 때,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제자들은 대답하였다.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세력이 있다.
이 세력은 예수를 잃게 하는 세력이다.
'모든 것' 안에 예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버린 자가 아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마11:28-30 20230510
백부장 고넬료는 자신의 신분이 베드로와 많이 달랐으나 베드로에게 듣고자 하여 그의 발 앞에 엎드릴 수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149:4]
겸손은 거만, 교만, 오만, 자고(自高)의 반대 개념으로 성서에 일관하고 있는 하나님 백성의 덕목이다. *[잠22:4,골3:12]
그리고 겸손은 낮고 천한 식물인 '우슬초'에, 도수장으로 잠잠히 끌려가는 어린양*[사53:7]의 모습에 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고 성품이다. *[슥9:9,빌2:6-8]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왕'은 흠모할 것 없는 우슬초의 모습으로, 사생자로 오해받을 만 한, 목수(木手)의 아들이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1-12]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는 누구인가?
심령이 가난한 자, 우슬초와 같은 낮은 마음으로 예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가 아닌가?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고 우슬초와 같이 낮은 마음은 이 세상과 육신의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니다.
이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자의 마음에 만들어진다.
본래 죄의 종이였던 자가 복음의 진리에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는 것처럼*[롬6:17-18], 먼저 메고 있는 멍에에 대한 감각과 탄식이 "내게로 오라"는 예수의 음성을 듣게 한다.
그리고 예수의 멍에에 함께 하면서 비로소 온유와 겸손을 배우고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사57:15]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시편57편 20230507
우리가 지금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은 우리 삶 속에 경험되는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배우는 일이다.
성경 속에서 나를 볼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나를 위한 처소가 보인다. *[시57:2]
이는 마치 데칼코마니와 같이 반영(反影)된 세계이다.
레위인은 이 땅에 기업이 없으므로 하늘에 속한 기업을 누리며 살 수밖에 없다.
이 땅에 머리 둘 곳이 없었던 예수는 하늘에 베개하고 사셨다.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 그리고 서로 다툼을 인하여 겪는 어려움은 인생사(人生史)에서 가장 큰 고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사람의 능력으로 헤치고 나올 수 없는 구덩이다. *[마5:4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사람의 다툼에서 어느 한 편을 위하지 않으신다. *[욥35:8,눅12:14]
다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다툼의 진원(震源)을 설명하여 주시고, *[렘2:19,약3:13-18] 그 震源이 사람의 마음인 것을 분명히 하신다. *[마15:18,렘17:9,약4:1]
'다툼'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툼'이 전부이다.
다툼은 다툼을 낳고 다툼은 다툼을 자라게 한다.
더욱이 가시와 엉겅퀴만을 내는 인생인 줄 안다고 할찌라도 찌르고 엉키는 다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인생이다.
다윗은 이 웅덩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윗의 시편은 데칼코마니와 같이 대칭된 두 세계를 노래한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헤아릴 수 없이 광대한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의 세계이다.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편114편 20230503
하나님께서 언어가 다른, 섞일 수 없는 애굽 민족으로부터 야곱의 집을 불러낼 때, 앞장 서는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었고 그의 백성은 여호와의 권세를 나타내는 영토가 되었다.
홍해와 요단에 넘실대던 사망의 세력이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지 못하고 물러갔다.
여호와의 강림은 산들을 흔들고 양 무리 같이 뛰놀게 하였다. *[눅19:40]
모든 육체가 야곱을 이끌었던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하여야 할 것은, 그는 반석을 못으로, 차돌로 샘물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11:19-20]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요6:35-39 20230430
예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요6:26-59]에게 받아드리기 어려운 말씀을 하신다.
열심히 예수를 찾아 온 자들을 향하여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고, 썩는 양식을 위하는 자들이고, 예수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도무지 보고도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들을 위하여 썩지 않는 영원한 양식인 자신을 소개하시며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 나를 먹고 마시는 일이 유일한 영생임을 밝히셨다.
이 말씀은 유월절 규례의 형식만 남아 있고 하나님이 보내신 유월절 어린 양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두운 백성을 밝히시는말씀이시다. *[사9:2]
그러나 스스로 예수를 찾은 자들은 모두 떠났다.
예수를 먹고 마실 수 있는 자는 스스로 예수를 찾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주신 자"들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6:44-45]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일, 하나님께 듣고 배우는 일, 유월절을 배우는 일, 율법을 아는 일은 예수께 보내기 위한 일이고 예수를 먹고 마실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유1:20,21 20230402
하나님의 교회는 믿음에 선 자들의 모임이고 구원의 기쁨을 함께하는 곳이다. *[고후1:24]
믿음은 진리의 복음을 듣고 성령의 도우심을 입은 자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엡1:13,사49:8]
유다서는 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우라는 권고의 편지이다. *[3절]
싸움의 대상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이고, *[4절]
성경에 이미 기록된 내용으로 이 거짓 세력이 설명되어 있다.
이들은 당을 짓는 자, 육에 속한 자, 성령은 없는 자들이다.
결국 이들은 교회 안에 용납될 수 없는 육신의 세력과 복음을 빙자한 자기 정욕을 뿜어낸다.
유다의 권고는 믿음의 도를 가진 자가 믿음을 떠난 자*[딤전4:1]에 대한 경계(警戒)이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믿음이다.
'지극히 거룩함'이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주신 이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지켜 주신다.
이 믿음은 성도를 지키는 세력이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지혜이다.
반드시 성취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이 성도의 삶과 결과를 지켜주신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마6:9,10 20230329
출애굽기에 기록되고 건축된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다.
이 모형이 전하는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는 1,500년 후에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33년 후에, 십자가에 오르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다. *[히1:3,10:12, 요17:5, 엡1:4]
이 성취는 바로 마태복음 6장 10절에 기록된 기도의 성취이다.
이 사실이 믿어진 사람은 더 이상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4:3]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10:9,10]
첫 것도 하나님이 보여주신 식양과 규례이지만 모형이다.
모형은 실체가 오시면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
둘째 것이 세워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
실체가 세워졌으면 모형은 저절로 버려진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도 그러하였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모형 안에 갇혀서 여전히 실체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 마음에 실체가 세워지지 못한 사람은 모형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거룩하게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원함이나 노력으로 거룩하여질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거룩하게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 거룩함을 얻은 사람이 누리는 세계이다.
"이루어지이다"는 바라는바, 기원(祈願)의 표현이다.
합격 통지서를 받아 본 사람은 더 이상 합격을 기원하지 않는다.
죄의 빚으로 고통받던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그 모든 빚을 탕감 받은 고지서를 받아 보게 되었다면 더 이상 죄의 탕감을 기원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죄인에게 주신 은혜의 탕감 고지서이고 하늘나라 합격 통지서이다.
예수께서는 "다 이루었다"*[요19:30]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알고도 "다 이루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을 만홀(漫忽)히 여기는 자가 아니겠는가? *[갈6:7,8]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 딛3:10-11 20230326
초대 교회는 유대교에게 이단이었다.
바울은 나사렛 이단의 괴수*[행24:5]로 불렸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땅에는 이 의인들의 비석을 꾸며 성공한 교회*[마23:29-36]들이 많다.
이들은 많은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기독교 집단들이다.
이단이라는 말은 이 땅에 득세한 종교 활동가들의 입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다.
주로 자신들의 체제나 교리와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상대방을 아주 쉽게 사악한 단체로 취급하는 일들을 볼 수 있다.
물론 자신들은 성경을 근거로 내린 판단이라고 하겠지만 그 행위의 열매가 그들의 소속을 증거한다.
이단(異端, heretick)이라는 단어는 개역한글 성경에 5회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고"*[딛3:11],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벧후2:1]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스스로 죄를 정하고, 스스로 주를 부인하고 멸망을 취하는 자"가 이단이다.
헬라어 어원에서 분리, 당파, 이단과 함께 '선택'이라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이 '선택'이라는 의미는 이단을 설명하여 주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스스로 죄를 정하고, 스스로 주를 부인하는 자는 예수의 선택과 예수의 섬김에서 벗어난 자들이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3:12]
바울은 잡힌바 된 신앙으로 잡힌바 된 구원을 확인하는 삶을 살았다.
이단은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고, 남을 정죄하고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스스로 택한 길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