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있는 자/ 마25: 20220102
[있는 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25:29)
이 말씀(달란트의 비유) 속의 풍족하게 되는 자의 소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슬기 있는 다섯 처녀가 소유한 지혜는 무엇인가?
반드시 신랑이 오시지만, 그 날과 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늘 기름을 준비하여야만 했다.
슬기 있는 다섯 처녀가 소유한 지혜는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늘 기름을 준비하는 마음이다.
충성된 종의 마음도 주인의 것으로 다스려진 마음이다.
재능조차도 주인의 것이고 맡긴 달란트로 그 능력을 나타낸다.
주인의 세력에 온전히 다스려진 종의 마음에는 자기 세력이 거세되어 있다.
무익한 자신에 대한 확증이 유익한 주인의 경영을 나타낸다. (눅17:10) 충성된 종의 마음에 주인이 있다.
종의 모양은 있지만 자신의 세력과 판단을 좇아 주인을 섬기려는 자는 그 마음에 주인이 없는, 주인을 이용하려는 가짜 종이다.
침노하는 자의 천국/ 마11:12 20211228
[침노하는 자의 천국]
모세의 율법은 천국에 이를 수 있는 행위를 요구한다.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 최상의 위치에 있는 자는 세례 요한이다. (마11:11)
그러나 이 인간의 최선으로는 천국에 이를 수 없다.
천국의 입구에서 인간적인 모든 것은 힘을 잃고 거부된다.
예수는 하나님의 최선이다.
허구에 속한 인간의 최선과 하나님의 최선이 만난 곳, 죄인을 대표하는 대제사장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난 그 곳에서 하늘이열렸다. (마3:16)
인간의 힘으로 이를 수 없는 멀고 먼 그 나라가 가까와졌다. (엡2:13)
인간의 최선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최선을 담은 마음과 힘에 의하여천국은 침노를 당한다.
성전과 판벽한 집/ 학1:1-5 20211226
[성전과 판벽한 집]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세계는 대부분 우리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각도로 새긴 우상(출32:4)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라는 하나님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사람의 생각 속에서 자신의 하나님이 만들어 진다.
솔로몬 때 지어졌던 성전이 소실된 후, 그 터 위에 다시 짓게 된 성전은 인간적 이해를 거부한 상황이 연출되며 건축되었다.
그 상황은 '여호와삼마(Jehovahshammah)「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의 성취이다. (겔 48:35)
학개서의 시작은 '이미 결정된 하나님의 때'와 함께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지적이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판벽한' 영역에 갇혀있는 백성을 이끌어 '전(殿)의 나중 영광'에 참여케 하신다.
이런 상황은 500년 후, 예수께서 말씀대로 이 땅에 오시면서 재현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2:19)
예수의 부활은 함께하는 자들에게 성전이 되었다.
육체에 가시, 사단의 사자/ 고후12:7 20211222
[육체에 가시, 사단의 사자]
가시는 찌르는 것이고 사단은 대적자이다.
바울의 육체에 바울을 괴롭게 하는 대적의 세력이 버티고 있다.
이 세력은 어느 날 돌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본래 모든 육체에 말뚝처럼 박혀있는 세력이다.
이 세력은 가인으로부터 라멕에 이르는 족보를 통해 선명하게 설명되어 있다.
자기 옳음에 대한 집착, 하나님을 향한 노여움, 살인, 인자하심을 멸시, 자기 성(城)에 갇힘, 만족할 수 없는 삶, 자신을 위하여 남을 죽이고 죽임을 당하여야 하는 사망의 영역에 빠진 삶.......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가인을 통하여 나타났던 세력이 우리 육신에 있다.
바울의 육체에 사단의 세력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있다.
그리고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라는 약속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아담의 형상(죄인)과 예수의 형상(의인)이 중첩된 곳에서 아담의 형상은 그 세력을 잃는다. (롬5:20)
우리의 구원은 "반드시 내가 너를 지킨다"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
그리고 육체에 가시와 사단의 세력을 인하여 그리스도의 권능을 누리는 구원이다.
솔로몬의 칼/ 왕상3:16-28 20211219
[솔로몬의 칼]
산 아들을 둘로 나누려는 솔로몬의 칼은 결국 거짓 어미와 참 어미를 분별해 놓았다.
'선과 악을 아는 것'과 '선과 악에 분별된 삶'은 그 영역을 달리 한다.
전자는 이론적인 영역이고 후자는 선이 악을 이기는 능력이 있는 영역이다. (마16:18, 롬12:21)
죽은 아들의 어미는 악을 이길 수 없었지만, 산 아들의 어미는 선을얻을 수 있었다.
두 어미가 모두 창기라는 동일한 신분으로 시작하여 동일한 생명의은택을 얻어 아들을 낳아 어미의 삶을 살지만, 결과는 생명을 잃어버리는 창기와 생명을 얻고 누리는 어미의 삶으로 나뉘어진다.
더러운 것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는 지혜는 깨끗한 것을 누릴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더러운 것을 알지만 더럽게 여기지 않는 삶은 더러움에 머물 수밖에없다.
솔로몬의 칼이 두 창기의 세계를 나눈 것처럼, 참 지혜는 사망과 생명의 세계를 분별케하고 최선의 아름다운 세계를 누리게 한다.
많은 의원과 효험/ 막5 20211215
[많은 의원과 효험]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받았다.
씻어도 씻어도 여전히 검은, 먹과 같은 죄로 물든 마음과 그 고통의 세계가 혈루증이라는 병으로 성경에 설명되고 있다.
이 병으로 고통을 받던 여인에게 고통을 더한 것은 많은 의원들의효험 없는 처방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의원, 새로운 처방에 기대하는 삶의 수고가 있었는데, 결국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허비되면서 더 큰 좌절(挫折)의 고통만이 여인에게 남았다.
절망에 이른 그 곳에서 여인은 예수를 만난다. 그리고 효험을 경험한다.
효험은 혈루의 근원이 마름을 몸에 깨닫는, 病魔(죄짐)에서 벗어난 크고 큰 안식이다.
병(죄)에 대한 감각, 많은 의원들의 효험 없는 진료와 괴로움, 그리고 있던 것이 바닥을 드러내는 좌절은 예수께로 이끄는 배경이 되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 세상에는 많은 괴로움을 주는 많은 의원들로가득하다.
예수께 자기들의 지경에서 떠나기를 구하는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로 가득하고, 돼지 때와 함께 할 수 있는 처방을 내는 의원들로가득하고, 굳어진 방식에 익숙한 야이로와 같은 종교인으로 가득하다.
예수를 에워싸는 많은 무리 가운데 한 여인이 예수의 능력을 체험하고, 예수는 자기 능력의 효능을 맛 본 자를 찾으시고 함께하신다.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의 능력과 그 효험을 맛 본 자들의 모임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복이 있도다 (시34:8)
피 흘린 죄/ 시51 20211212
[피 흘린 죄]
시편 51편 다윗의 회개 속 '피 흘린 죄'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배경이 되었다.
도적을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출22:2), '무죄한 피 흘린 죄'는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다(신19:13).
다윗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것은 '무죄한 피 흘린 죄'에 속한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시51:14)
다윗의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없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구원이다.
이는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진 자'의 구원이고(호14:1), 무죄한 예수의 피를 흘린 자들에 대한 구원의 근거를 제공한다.
이 기이한 하나님의 율례 속에서 우리는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고 판정하시는 하나님의 의을 얻는다(요3:18).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3-24)
성전의 아름다움/ 시65 20211208
[성전의 아름다움]
이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가까이오게 하사 하나님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이다.
이 사람은 죄악을 이길 수 없어서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있었다.
육체뿐인 인생이 자기 만족을 위한 삶의 열매는 죄악이다. (시90:, 마26:7)
하나님이 제시한 동방 에덴으로 만족할 수 없는 아담 안의 삶이파산에 이른 곳......,
이 곳은 쥐엄열매로 배를 채울 수 없는 탕자의 탄식이 있던 곳, 무덤과 무덤 사이에서 군대 귀신이 고통하던 곳이다.
영혼의 파산에 이른 자를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곳은거룩함과 완전함을 누리는 세계이다.
더 이상의 시비(是非), 귀천, 우열(優劣), 빈부를 구별하는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다. (사11:1-9, 40:1-5)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일로 만족할 수 있는 곳, 이 하나님의 성전이 아름답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요8:11 20211205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말씀은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는 말씀 만큼 귀중한 메시지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의 '결코 정죄함이 없는 삶'을보존하며 그리스도의 사랑 안의 삶을 지켜주시는 명령이자 언약이시기 때문이다.
'범죄(犯罪)'는 '죄를 범하다'는 뜻이다.
원어가 전하는 의미 속에서 '빗나가다', '과녁을맞추지 못하다',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벗어나다'는 본래의 뜻을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있는인생을, 정죄할 것이 없는 거룩한 영역으로 옮겨놓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옮겨진 자에게 말씀하신다.
"이 은혜와 생명과 성령의 법에서 벗어나지 말라."
이 말씀은 이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영역에 옮겨진 자에게 유효하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줄로 아은 것까지 빼앗기라라 하시니라 (눅8:18)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 요8:1-11 20211201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
방금 전 범죄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이 성전에 앉아 백성을 가르치는 예수로부터 결국 정죄하지 않는다는 판정을 받는다.
성소의 번제단과 시은좌는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예표이었다.
우리는 실제로 간음 중에 잡혀 본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마음 속에 똬리치고 있는 음란과 하나님에 대한 음란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의 음란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번제단과 시은좌, 속죄소의 하나님과 연결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의 범죄는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어긋나,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인생인 줄 알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법정에 이끌려 온 자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입법자이시고 집행하시는 분의 음성을 듣는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늘이 열리고/ 마3:13-17 20211128
[하늘이 열리고]
닫혀 있었던 하늘이 예수를 향하여 열렸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그분께 임하시면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에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 모든 것은 거룩하다.
그 거룩함과 말씀의 실체가 육신으로 오신 예수를 통하여 나타났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거룩함)을 이루셨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0)
거룩함으로 세상과 분리된 무리에게도 하늘이 열리고 아버지의마음과 자녀의 마음이 만나(말4:6) 사귐을 갖는 새 생명의 삶을산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6:4)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하신 일과 말씀이 믿어진 삶이다.
회개와 천국/ 마3:1-12 20211124
[회개와 천국]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 천국에 이르기 위하여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 Repent'를 외쳤다.
'회개(悔改)'의 헬라어 metanoevw {메타노에오 met-an-o-eh'-o} 는 '마음을 바꾸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요구는 먼저 세례 요한의 마음에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하였을 때(눅3:2), 그는 비로소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수 있었다.
이 회개는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세계가 아닌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의 전환을 의미한다.
특히 본질을 망각한 인위적 종교 활동에서의 회개이다.
인생 본질에 대한 하나님의 판정은 흙(창3:19)이고, 없는 것(롬4:17)이고 마귀의 자식(요8:44)이다.
이 하나님의 판정에 함께할 수 있다면 회개된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회개된 마음을 위한 천국,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준비하셨다.
고창병과 소금/ 눅14 20211121
[고창병과 소금]
고창병(蠱脹病, Dropsy, 水腫)은 복부에 비정상적으로 물이나 가스가 차서 생기는 병이다.
말석에 합당한 사람이 스스로 상좌에 합당한 사람으로 여기는 마음으로 산다면 영적(靈的) 고창병 환자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상좌에 앉을 목적으로 말석에 앉는 수고를 한다면 악성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담 안의 모든 인생에게 말석을 사모하는 마음은 없다.
인생의 마음에 채워진 것은 스스로 높아지고 싶은 마음이지 낮아지고 싶은 마음이 아니다.
그 낮은 곳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이다.
소외되고, 무시당하고, 욕먹고, 능욕을 받고, 버려지는 곳이다.
이곳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곳이지 인생이 택할 만한 곳이 못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낮출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인생에게 품부하신 적이 없다.
만일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아무런 관계가 형성되지 못한다.
왜 말석에 앉으려 하는가?
그리고 지금 말석에 앉으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는 누구인가?
"말석에 앉으라!"는 말씀이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자신에게는 그 낮은 곳이 아니라 높은 곳을 원하는 마음만이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이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에 다스려진, 짠 맛을 내는 자가 아닌가?
말씀을 통하여 교만과 정욕과 절망이 전부인 자신의 신분을 맛본 자가 예수 그리스도 사역과의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절망적인 자신의 신분을 맛보지 못한 마음은 스스로 말석에 앉으려 하고 앉는 일에 성공하였다고 자랑한다.
그는 영적 고창병 환자이고 짠 맛을 내지 못하는, 맛을 잃은 그리스도인이다.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삶/ 전3 20211020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삶/ 전도서 3장]
삶의 결과가 최선이라는 열매로 맺힌다면 그 삶의 시작과 과정도 최선으로 가는 여정이 된다.
반대로 삶의 결과가 최악이면 그 삶의 시작과 과정도 최악을 위한 배경이 된다.
인생의 삶은 그 결과에 의하여 화복(禍福)이 결정된다.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주었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이 믿어진 사람은 그 시작과 과정의 모든 때를 감사와 즐거움으로 누릴 수 있는 권세를 갖는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49:20)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목적한 것에는 때가 있는데 이 때를 정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날 때'도 하나님, '죽을 때'도 하나님.
'울 때'도 하나님, '웃을 때'도 하나님이다.
모든 '때'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거하는 인생들에게 '최선의 영원한 때'를 누리는 존귀함을 주셨으나 누리지 못하는 인생은 '멸망하는 짐승'같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최선의 결과를 주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즐거워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립보서 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