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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롬8:9-11 20230716
로마서 8장은 죄와 사망의 매임에서 풀려난 해방의 찬가로 시작된다.
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누리는 감사와 축복의 배경은 7장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이다.
육신에 매인 삶이란 육신의 생각과 판단을 신뢰하는 삶이다.
비록 속죄된 신분을 얻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원함과 마음의 법을 따라가면 도달하는 곳이 정죄의 구덩이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이 정죄의 영역에서의 해방을 포함한다.
거듭남은 도약(跳躍)이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죄에서 의(義)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삶이다.
육신의 정체는 어두움이고 불의이고 사망이다.
육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육신의 구덩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시40:1-3]
기다림의 대상은 육신의 내부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오는 세력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외부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세력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세력을 거부하는 유일한 세력이 자신의 육신인 것을 알게 된 사람이다.*[롬8:7]
기다리는 자의 마음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임하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께서 기다린 자를 주관하여 주신다.
이것이 무엇이냐/ 출16:12-15 20230712
'만나'의 이름이 그러하듯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고*[요1:10,26,31] 예수는 세상의 지혜로 헤아릴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철 풀무 같은 애굽*[왕상8:51]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실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와 홍해 바다 밑의 마른 땅과 광야에서 먹이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패역의 구덩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만나'는 척박한 땅인 광야에서의 삶을 보장하는, 살아 계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하늘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음식은 결국 '박한 식물'로 취급되었다. *[민21:5 ]
"이것이 무엇인가?"
백성들이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의 양식이 그들의 혀에서, 입에서, 생각에서 "박한 식물"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극상품의 세계를 주셨지만, 백성은 이 세계를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패역을 드러내었다.*[사5:1-2]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택하신 것은 이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우월한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신9:5],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 잘 나타날 수 있는 족속이기 때문이 아닌가? *[겔2:3, 시103:14, 눅5:32]
'만나'가 결국 그들의 생각과 경험 안에서 '박한 식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에서도 여전하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 '예수'는 박제(剝製)된 우상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다 예수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버리지 않겠다는 베드로의 진심(?)을 예수께서 거절하셨다.
만일 베드로의 충성이 성공하였다면 이 세상에는 '베드로의 예수교'가 탄생하였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신앙을 누릴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속하여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 감지된 가난한 심령이다. *[마5:3]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고전2:1-5 2023070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8:23]
이 아래 세상이 3차원의 영역이고, 예수께서 속한 세계가 4차원이라면, 3차원의 사고로는4차원을 헤아릴 수 없다.
만일 3차원의 사고와 행위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자의적 숭배이고 인위적 종교 활동이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고전10:20]
하나님과의 교제는 3차원에서 4차원으로 옮겨진 자가 누리는 세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이 사실은 이 세상 사람을 하나님의 영역으로 옮겨지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고 하나님의 지혜이다. *[고전1:30]
바울은 이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정하였다.
이 사실을 증거할 때, 자신의 약함을 인하여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간증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이 전하는 이 사실을 증거하여 주지 못한다면, 이 사실은 3차원의 세상에 머물고 떠도는 공허한 이야기, 세상 사람들이 억지로 잡아 임금 삼은 예수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요6:15]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마음은 자신의 3차원 세상이 끝났음이 확정된 마음이다.
이 마음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의 마음이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마음이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의 세계를 누릴 수 없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무시할 만큼 스스로 지혜있는 자로 여기는 자이다.
하나님에 속한 사람은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분별하는 힘을 얻어 하나님과 함께 한다.
버드나무에 걸린 수금/ 시137:1-6 20230705
비록 수금은 버드나무에 걸려 있지만 시온을 기억하는 하나님 백성의 슬픔과 탄식은 소리 없는 노래가 되어 흐른다.
그리고 여호와를 부르는 백성의 이 노래는 결국 예루살렘의 회복과 기쁨의 원천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바벨론 강변 버드나무에 걸려 있는 수금에는 포로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과거와 현재와 소망이 함께 한다.
한때 여호와를 찬양하였지만, 지금은 여호와를 희롱하는 자를 위한 시간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금은 쪼개지거나 강물에 던져지지 아니하고 버드나무에 걸려 있다.
지금은 슬픔의 시간이다.
그러나 시온의 기억 속에 슬픔과 정죄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시온은 여호와의 거룩한 산*[사14:32,시2:6]이고 여호와의 거처*[시9:11]이다. 여호와께서는 시온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고*[암1:2] 거기서 구원을 보내며*[시14:7,53:6], 거기서 축복하신다*[시128:5,134:3].
지금 아무리 밤이 깊을지라도 시온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에게 새벽은 온다.
'기다림' 안에 '밝아 옴'이 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벧전2:9-11 20230702
나는 하나님을 소유하였는가? 하나님의 소유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택한 족속인가?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인가?
각도로 새겨 만든 금송아지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의하여 만들어진 하나님인 것처럼,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만들어지는 하나님이 있다.
금송아지는 백성들이 택한 하나님이고 백성이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이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모습으로 예수 앞에 나왔으나 예수께서는 그를 "하나님 나라를 본 적이 없는 자"로 여기셨다.
거듭남은 어두움의 세계에서 빛의 나라에 옮겨짐을 의미한다. *[벧전2:9]
어두움은 하나님을 잃은, 하나님 없는 세계이다.
바울은 이 어두움에서 눈을 뜨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신을 볼 수 있었다.*[행9:15]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엡5:8]
"너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 *[엡5:14]
빛의 자녀들의 원적(原籍)은 어두움이다.
이 어두움의 터널에서 나온 자들이 빛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인이다.
7년 흉년*[창47장]은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돈, 짐승, 전지(田地)가 생명을 보존하여 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이 물질에 목숨을 걸고 사는 인생은 어두움에 속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은 하나님의 모든 소유를 누리며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을 잃은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그것에 매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레4:13-21 20230607
레위기 4장에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 이스라엘 온 회중, 족장, 그리고 평민에 대한 속죄 제사법이 기록되어 있다.
제사장을 제외하고 모두 "범한 죄를 깨닫는" 일이 제사의 시작을 알린다.
나면서 소경인 사람은 소경인 줄 깨달아야 빛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죄 가운데 태어난 인생은 죄를 깨달아야 '의(義)'의 제사[시4:5]를 드릴 수 있다.
하나님의 제사는 죄를 깨달은 사람이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준비된 예법에 참여하여 죄가 처리된다.
제사의 시작은 '흙 덩어리 아담'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가죽 옷'에 기원 한다.
이는 죄가 깨달아진 아담[창3:20]에게 하나님께서 보이신 '대속의 제사'이다.
그리고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제사는 '흙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께 속하게 하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 창세기 3, 4장 말씀을 근거로 죄를 깨닫는 일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다.
모세의 율법에 금령이 포함되어 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기준이고 죄를 깨닫는 일은 아담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고 하나님에 대하여 페역한 자신을 깨닫는 일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있는 것'이 믿어진 것이다.
'없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착각이다.
죄도 하나님도 보이지 않지만 있다.
죄의 정체가 뚜렷이 보이면 하나님의 준비하신 세계가 밝히 보인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51:17]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고전9:1-2 20230604
바울의 이 간증은 자신이 사도로서의 삶의 규모와 자유자로서의 삶의 방향을 밝히는 고린도전서 9장의 서두(序頭)이다.
바울의 결론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반납하고(19절), 복음을 인하여 사도의 권리를 다 쓰지 않고 범사에 참는 삶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12,15,18절).
바울은 먼저 자신이 사도임을 확증하는 증거를 복음을 전한 자와 복음을 듣고 이끌림을 받은 자와의 관계로 제시한다(2절).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에 사도가 존재하고,*[고후11:2]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에 성령의 도우심이 나타난다. *[고후6:2]
사망 가운데 생명을 얻은 자가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은 생명을 생명으로 여긴 믿음의 열매이다. *[롬10:10]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은 복음으로 얻은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16절).
바을은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은 형제 자매들과 함께 복음에 참여하는 자로 발견되려는 것임을 밝힌다(23절).
복음을 전하는 자는 자신이 복음에 참여된 은혜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 은혜에 만족케 하는 하나님의 지혜는 육신의 요구를 제어하는 힘이다. *[롬8:13]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6:1-6 20230531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수 있는가?
오른손의 하는 일은 오른손이 아니라 오른손의 주인이 하는 일이다.
만일 오른손이 스스로 옳은 일을 하였다고 생각한다면, 몸에서 떨어진, 주인을 잃은 오른손이 아니겠는가?
주인이 없는 오른손, 왼손이 있을 수 없지만, 성경에는 주인 잃은 오른손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염소는 스스로 하나님을 잘 섬긴 오른손의 모습이다.
염소는 하나님 섬겼는데 하나님은 섬김을 받은 적이 없다.
오른손이 주인과 단절된, 주인을 잃어버린 모습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마음과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하는 마음은 다르다. *[빌3:7-9]
전자(前者)는 세상을 향한 음란한 마음이고 후자는 하나님을 향한 "전자의 마음이 할례된" 마음이다.
옳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붙어 있는 오른손은 옳은 일을 나타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오른손은 하나님께 붙어 있는 손이 아니다. 이미 찍혀 떨어진 손이다. *[마5:30]
그리스도 안에 오른손 왼손이 없다.
모두 붙어 있는 손이고 의의 도구이다.
주인의 영광과 존귀를 붙어 있는 모든 것이 함께 누린다.
붙어 있는 손이 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보상이 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일에 사용된 것이 보상이 아닌가?
도를 행하는 자, 자신을 속이는 자/ 약1:22-25, 호14:9 20230528
아담 안의 모든 인생은 악하다. *[마12:35]
가인은 악한 자에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고 아우는 의로운 행위를 나타냈다. *[요일3:12]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사람은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 존재이다.
가인과 아벨은 그 출생이 동일한 나쁜 나무의 신분이다.
가인은 자기 자신에 속한 행위를 나타내었지만, 아벨은 자기에 속한 행위가 아닌 다른 선한 행위를 나타냈다.
선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세력이다.*[눅18:19, 롬3:4]
아벨의 행위는 자신의 것에 머문 행위가 아니라 '의로운 대속의 도'를 따라간 행위이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호14:9]
이 도(말씀)를 행하는 자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드려다보고 실행하는 자'이다.
호세아서 14장은 이 온전한 하나님의 율법의 구체적인 설명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얻은 자,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의인은 하나님의 판정에 의하여 완전히 그른 자신을 발견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의에 이끌림을 받는 자이다.
그러나 도를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가인의 길을 밟는다. *[유1:10-11]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들은 말씀 속의 자신을 부인하는 자이고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는*[요9:41, 사14:13], 스스로 취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이다.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요9:39-41 20230524
제자들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의 저주가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인가를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소경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소경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일은 소경이 눈을 뜨는 일이다.
소경은 예수의 말씀을 따라 실로암 못에 가서 진흙 바른 눈을 씻고 보게 되었다.
소경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안식일을 범하는 죄인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안식'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볼 수 없게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우준하여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찌어다 [렘5:21]
소경으로 출생한 사람이 눈을 뜨지 않고는 '빛의 세계'를 알 수 없다.
눈을 떠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듣고 배워 알게 된 '빛의 세계'는 소경의 머리에서 학습되고 만들어진 빛의 세계이다.
이런 사람은 빛에 대한 지식이 있으나 여전히 소경이다.
빛의 세계는 빛이 보여야만 깨달을 수 있는 세계이고 눈 뜬 자의 세계이다.
모든 인생은 아담 안에서 영적 소경이고 귀머거리이고 지각없는 자들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이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본다고 하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하심이다.
소경인데 소경인 줄 모르는 자가 죄인이고 귀머거리인데 귀머거리인 줄 모는 자가 거짓 영인 죄에 사로잡힌 자이다. *[사29:13,14]
소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고, 귀머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하여 지각이 없는 자가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지혜와 권능은 하나님에게 있다. *[단2:20,21]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