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가 작아 볼 수 없어/ 눅19:2-4 20220316
[키가 작아 볼 수 없어/ 눅19:2-4]
1. 예수를 보려고
2. 키가 작아
3. 사람이 많아
이 세 가지는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야만 하였던 이유이다.
삭개오가 세리장이고 부자라는 사실은 이 상황을 평범하게 여길 수 없게 한다.
삭개오로 하여금 뽕나무에 오를 수밖에 없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세력이 있다.
세상의 권세나 부요함으로 작은 키의 결핍이 극복될 수 없는 것처럼,
삭개오가 삶을 바쳐 빚어 낸 세리장과 부자라는 신분은 하나님 앞에 가릴 수도 없고 변명할 수도 없는 저주의 열매가 되었다.
키가 작아 꼭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없는 상황이 육체에 임한 장애(障碍)이고 저주라면, 하나님의 진리를 볼 수 없게 하는 장애는 그야말로 심연을 헤매는 영혼에 임한 저주가 아니겠는가?
모든 인생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소경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요9:39)
하나님을 볼 수 없게 하는 세력은 세상이 아니고 돈이 아니라 이것에 휘둘리는 마음에 있다.
이 저주의 세력은 장애를 장애로 여기지 못하게 하고. 장애를 정상이라고 포장하는 데 힘을 쏟아 내는 마음이다.
그러나 삭개오에게는 이 장애가 저주로 임하였고, 그 저주에 젖은 마음으로 뽕나무에 올랐다.
그리고 결국 거기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다.
죄의 소원/ 창4:3-7 20220313
[죄의 소원/ 창4:3-7]
동생을 죽일 만큼의 분노는 그 진원지가 어디인가?
창세기 4장 말씀에는 아담에게서 나온 사람들의 삶의 시작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시작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가인의 선택과 그의 분노와 주장이 지면을 진동한다.
범죄의 진원은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활화산과 같은 가인을 통하여 죄와 죄의 소원과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과 다스리지 못한 결과를 설명해 주신다.
죄의 소원(所願), 죄의 바라는 바는 바로 가인이다.
가인의 택한 제물(祭物)과 그 수고의 댓가를 인정 받고 스스로 옳다 여김을 바라는 마음과 죄의 소원이 그 결을 같이한다. (*죄의 정욕/ 롬7:5)
가인의 선택이 선이 아닌 것을 하나님께서 지적하신다.
그러나 가인의 마음에 엎드려 있는 죄는 하나님을 거절하게 하여 소원을 성취한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죄를 짓는다. (롬7:18-20)
아담 안의 모든 인생은 죄에 감염된 상태로 이 땅에 태어난 죄인이다.
가인은 특별히 분류된 인물이 아니다.
모든 인생의 형상이다.
죄의 소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생은 없다. 결국 죄의 종된 삶과 사망이 있을 뿐이다.
이 사실을 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준비된 통로가아벨의 제사이다.
이 통로는 죄의 소원을 거절하지 못하고, 죄악을 이기지 못한 사람(시65:3)을 위하여 조건 없이 열어 놓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다.
죄가 가인을 원하고, 연모하고, 갈망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원하시고 사랑하시는 바도 가인이고 우리이다.
다만 '땅의 소산'이 아니라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나아오라고 하신다.
그리스도를 깨달아/ 골2:1-3 20220309
[그리스도를 깨달아/ 골2:1-3]
바울은 자신의 사역 속에서 겪는 큰 수고가 무엇인지를 전하므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한다.
'지식적인 동의(同意)'와 '깨달음'의 세계는 다르다.
'지식적 동의'는 그 지식을 얻은 자의 지식적 분별 아래 여전히 머물러 있는 현상이고, '깨달음'은 지금까지의 지식적 분별 영역에서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진 결과를 나타낸다. (*니고데모와 거듭남)
만일 옮겨지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전한다면 결국 '자의적 숭배'에 머물러 있는 자, 모양만 내는 종교 활동의 가증함에 휘둘리는 자가 된다. (*눅18:10-)
깨달음은 육적 몸을 벗는 것과 그리스도의 할례에 연결되어 있다.
손으로 하지 아니한 그리스도의 할례는 그와 함께 죽고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자 마음에 새겨진 흔적이다.(*갈6:17)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아 그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얻어 누리는 삶이 교회 안의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 삶은 육체 좇는 것을 이긴 자, 예수의 십자가 승리에 함께하는 자들이 누리는 세계이다.
초막 셋/ 막9:1-7 20220306
[초막 셋/ 막9:1-7]
하나님 나라와 그 권능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이해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베드로는 변화되신 예수의 형상을 보고 두렵고 현황한 가운데 엉겁결에 초막 셋을 짓고 싶은 마음을 나타낸다.
초막 셋은 스승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는 공간으로, 베드로 마음에 형성된 경배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베드로에게는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가 왜 만나고 무슨 대화가 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베드로는 예수의 눈부신 광채의 형상에 압도 당하였고, 어떻게 모세와 엘리야인 줄 알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두 사람의 권위에 압도 당하였다.
'초막 셋'은 하나님 나라와 그 권위에 대한 베드로의 종교성을 설명해 주고 있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심과 희생과 의지이다.
그러나 지금 변형된 예수께서는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일(눅9:31), 십자가에 오르실 일, 베드로와 우리와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하시는 일에 대하여 두 사람과 대화하고 계셨다.
베드로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아니하시고 "사랑하는 아들 예수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하나님을 위한 초막에는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다. (고전3:10-17)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으로 베드로를 위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셨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와 권능(롬1:4)의 결정적인 실현이다.
사르밧 과부/ 왕상17:12-18 20220302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왕상17:12-18]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로 하여금 엘리야를 공궤케 하셨다.
온 땅이 가뭄에 신음하고 있는 상황에 과부와 그 아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식량은 통에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이다.
이 음식은 과부와 아들의 생명과 연결된 가장 귀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엘리야는 과부의 전부인 이 떡 한 조각을 요구한다.
이는 인생의 상식에서 벗어난 강도 수준의 요구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과부의 마음에 형성된, 그 유일한 음식에 대한 인식과 엘리야의 요구에 대한 반응이다.
"이 음식을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마지막 남은 소중한 음식이니까 잘 먹고 힘을 내어, 더욱이 아들의 생명과 생존을 위한 투쟁에 기력을 다해 "살아보자!"라는 상식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먹고 죽으리라"는 인식이 과부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이 음식을 '먹어도, 먹지 않아도 결국 죽음'이라는 과부의 마음에 형성된 분별의 지혜는 엘리야에게로 음식이 옮겨지게 하는 힘이 아니겠는가?
결국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엘리야에게로 물어 오는 것과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사르밧 과부의 마음에 만들어진 재물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창조된 지혜이다.
▶ 모두 듣기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14:41,42 20220227
[일어나라, 함께 가자/막14:41,42]
겟세마네의 세 번째 기도에서 예수는 자신의 요구가 아닌 하나님의 영화로운 결정(요17:1)으로 이끌리셨다.
그리고 깨어 있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와 새로운 말씀을 하셨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kv족하다)"
"깨어 있으라"는 예수의 요구는 육신이 연약하여 감당할 수 없었는데, "자고 쉬라, 족하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제자들이 더 이상무엇을 해야 할 일이 없는 요구이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이 세 번째 요구에 대하여도 제자들은 함께 할 수 없었다.
결국 예수께서는 당시 종교 세력에 잡히시고 제자들은 예수를버리고 도망하였다.
"깨어 있으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이 예수의 요구를 감당할 수 있는 제자는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감당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홀로 못 박히시고 부활하셨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2:12)
"일어나라, 함께 가자!"
정하다/ 레13:12-17 20220223
[정하다/ 레13:12-17]
문둥병은 부정하지만 전신 문둥병자에게는 '정하다'는 진단이 내려진다.
하나님의 이 충격적인 결정은 다윗의 시편 속 한 구절에 담긴 기이한 내용의 기도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51:3,4)
다윗은 항상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이고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는데, 어떻게 '의롭다, 순전하다'는 하나님의 판정을 확신하고 있는 것인가?
부분 문둥병자가 부정하면 전신 문둥병자는 '확실히 부정하다'는 판정이 있어야 하고,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면 '불의하다, 더럽다'는 판정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이 뒤집히는 충격적인 하나님의 결정이다.
이 결정을 가능케하는 내밀한 하나님의 증거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 양식이고 자랑이고 기쁨이다.
*듣기
여호와를 믿으니/ 창15:5-7 20220220
[여호와를 믿으니]
창세기 12장의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제시한, 상상으로도 헤아리기 어려운 엄청난 계약은 '떠나라'와 '되리라'이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복의 근원이 되는 세계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율례와 법도에 이끌린 아브라함은(창26:5) 하나님과의 계약을 성취하고 복을 누리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은 '구원'의 세계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 있는 아브라함을 불러 관계를 회복하시려고 제시한 말씀은 '떠나라'와 '되리라'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15:4,5)
하나님께서 또 제시한 구체적인 약속 앞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머물러 있던 '엘리에셀'에서 떠나 '여호와'를 향한다.
엘리에셀을 포기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더 구체적인고 친밀한 믿음의 관계로 나아간다.
아브라함의 마음에 일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이 관계를 가능케 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믿음은 분량이 아니라 대상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사람의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향하고 구하고 의지하고 누리는 활동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히11:6)
*듣기
좋은 나무/ 마7:15-20 20220216
**13 내 마음에 비추인 예수/ 좋은 나무/ 마7:15-20
[좋은 나무]
돼지에게는 진주를 귀히 여기는 분별의 지혜가 없다.
이 지혜가 없기 때문에 귀한 것을 구할 이유도 없고 얻고 누릴 수도 없다.
개와 돼지의 이야기는 육신을 좇는 우리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시와 엉겅퀴도 포도와 무화과를 열매 맺을 수 없는 인생을 설명해 준다.
가시와 엉겅퀴에게 예비된 불사름이 못된 나무의 결과이고 전부이다.
인생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못된 나무인 줄 아는 분별은 생명을 얻는 지혜에 연결되어 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잠3:18)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새들이 깃들고 뜨거운 날 쉴 만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좋은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이다.
이 좋은 나무는 모든 인생에게 생명을 공급하려고 찍힘을 당하여 십자가가 되었다.
생명을 얻은 그의 백성들은 오늘도 십자가 그늘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린다.
*듣기
인치심/ 엡1:13 20220213
**내 마음에 비추인 예수 12
[인치심/ 엡1:13]
인(印)치심이란 '도장을 찍다'는 뜻으로 "너는 내 것이다"(사43:1)라는 확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확정의 인(印)은 '약속의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 된 최종 결정이다.
이 결정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입김이고 구원의 근거이다.
사람의 신체를 섭씨 36.5도로 유지해 주는 기능이 신체 생명을 유지해 주는 것처럼, '약속의 성령'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주어진 믿음과 분별의 세력이다.
이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다.(행2:38)
그러나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를 아는 것에 머물러 있었던 것처럼(행18:24-) 예수에 관한 지식이 많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인치심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복음이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음(살전1:5)으로 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온전한 구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없다.
복음 안에 있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믿음은 세상에 속한 지혜와 이성과 노력으로 헤아려 얻을 수 있는 세력이 아니다. (고전1:27)
도리어 육신에 속한 이해와 기대가 포기된 곳, '죄'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판정에 다스려진 심령에게 주어지는 믿음이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 (살후2:13)
혀로 '맛 본' 사과의 맛을 말과 글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지만,
'맛 본' 자가 그 맛에 대하여 말할 때, '맛 본' 자만이 그 말을 알아듣는다.
그리고 자신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맛 본 자가 예수의 '길과 진리와 생명'을 맛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