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성경 공부 17
예수의 권세/ 마21:23-27/ 20230823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과*[말4:4-5] 이에 대한 예수의 증거*[마17:10-13]는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의 계획과 권세임을 증거한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찬양할 수 있는 자는 예수의 권세 아래 있는 백성이다.
그리고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 돈 바꾸는 자, 비둘기 파는 자들의 상을 엎으신 것이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도 하나님의 권세를 나타내심이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이 예수의 일을 하나님의 권세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에게 성경은 있었지만,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신 성경 속의 말씀은 믿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성전과 제사법은 있었지만,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멀어 있었다.
그들은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열매를 내지 아니하는 무화과를 저주하시는 전능자의 위엄과 믿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예수의 사역을 납득할 수 없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예수께서 제시하여 주셨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나 통찰의 열매가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초보는 말씀과 율법의 권세에 온전히 다스려진 자의 마음에 맺히는 열매이다.
이 믿음이 예수의 권세 아래 이르게 한다. *[롬1:17]
죄를 모르고 예수를 알 수 없다.
나를 깨닫게 하는 율법의 권세에 다스려진 사람, 죄와 사망의 법에 다스려져 '죽은 자'로 발견된 사람이 예수의 권세 아래 살 수 있다.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나1:1-3/ 20230816
여기 나훔서에서 회오리와 광풍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거친 호흡이다.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신다는 지존자의 결단은 죄를 심상히 여기는 인생의 마음을 두드리는 하나님의 탄식이 아닌가?
100여 년 전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던 니느웨는, 이제 격노하시는 하나님의 엄위 아래 멸망에 이르렀다.
이 니느웨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신다.
이 하나님의 진노는 니느웨만을 향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오늘날 복음을 들었으나 성령의 이끌림을 받지 못하는, 교회의 모양은 있으나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향한다.
회리바람과 광풍을 사역자로 삼으시고*[시104:4], 죄인을 발아래 티끌로 두시는 하나님의 분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생은 없다.
그러나 이 땅에 임한 모든 재앙에서 창조주의 죄와 죄인에 대한 분노를 감각하는 피조물에게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제시하신다.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 모든 인생에게 임한 가장 크고 두려운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날이다. *[말4장]
십자가에 모든 인생의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 드러났고, 하나님께서는 이 죄악을 심판하셨다.
이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온전히 반응하는 영혼은 '대속'의 구원으로 이끌림을 받는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열심'이 구원을 이루셨다.
구원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회리바람과 광풍과 같은 하나님의 진노와 죄인을 결코 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을 기억하고 있다.
옥터가 움직이고/ 행16:25-26/ 20230813
바울과 실라는 귀신 들려 점하는 여종 하나를 만났다.
그 귀신을 여자에게서 나오게 한 이유로 바울과 실라는 많이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혀 착고에 채워졌다.
한밤중에 이르러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하게 되었고 죄수들은 바울의 말을 듣게 되었다.
때에, 돌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다.
더 큰 일이 벌어진 것은, 감옥 안에 있던 모든 죄수가 한 사람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바울과 함께한 사실이다.
깊은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 오직 소망은 감옥을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입을 통하여 들려진 말씀의 힘은 그들로 하여금 바울과 함께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바울과 실라가 애매히 고난을 받아 깊은 감옥에 갇혔을지라도 그 마음은 형편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의 마음을 진동하는 하나님의 세력은 죄수들에게 옮겨졌다.
지진에 있고,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리기 전에, 하나님의 세력이 바울과 함께하는 자들의 모든 매인 것들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옥터가 움직이는 사도행전의 말씀은 오늘도 보고 읽고 듣는 우리의 마음에 옮겨 와 큰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진동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여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는 힘이다. *[사61:1]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인/ 왕상19:14-18/ 20230809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하나님의 단 앞에서 죽이고 3년간 닫힌 하늘을 열어 비가 내리게 하는 엘리야이지만, 이세벨의 분노하는 말 한마디를 듣고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는 엘리야의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한없이 작아지고 두려워하며 "주의 선지자는 나만 남았나이다."라는 엘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나 내가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 칠천 명을 남겨 두었나니 곧 바알에게 절하지 아니한 모든 무릎과 바알에게 입 맞추지아니한 모든 입이니라, 하시니라. [왕상19:18, kjv흠정역]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만을 남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 칠천 선지자를 남겨 두었다고 말씀하신다.
'바알(l['B', Baal)'은 '주인'이라는 뜻이고 바알 선지자들의 하나님이다.
이 우상은 가나안 지경의 땅에 풍요를 가져다준다는 생산신(生産神)이다.
바알에게 절하지 아니한 '무릎'과 입 맞추지 아니한 '입'은 '풍요의 재신(財神)'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다스려진 무릎과 입이다.
이 여호와께 다스려진 무릎과 입은 모든 존재의 시작이고 끝이신 여호와의 능력으로 본성(本性)이 거세된 무릎과 입이다.
인생의 본성은 육체의 풍요로움과 건강과 명예를 얻기 위한 정욕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 본성을 육신의 원함이나 노력으로 제어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썩어질 세력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내시려고 먼저 선지자를 백성 앞에 세우시고 선지자의 무릎과 입에 바알을 거부하는 지혜와 힘을 주신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2:11]
하나님의 심판/ 벧후3:6-13 20230806
노아의 홍수는 온 세상을 죽음의 바다로 만든 하나님의 심판이고 후대 사람들을 위한 경고이다.
이 하나님의 심판은 '육체이므로 범죄할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이다. *[창6:3]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밷후3:6-7]
홍수의 경고를 무시한 인생들의 높은 마음 위에 물이 덮이는 심판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굳어진 마음을 소멸할 불의 심판이 준비 되어 있다.
이 땅에 속한 인생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법은 '죄와 사망의 법'이다. 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생은 없다.
그러나 노아 홍수가 노아 방주를 만들게 한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죽을 자를 살리시기 위한 사역이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밷후3:9]
만일 죽은 자를 죽이는 심판이면 이 심판은 공허하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기를 원하신다. *[마10:8, 롬4:17]
율법은 죽어 있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줄 알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한다. *[롬3:19-20]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한 엄위(嚴威)이다.
하나님의 인생을 향한 심판 속에는 반드시 피할 길이 준비되어 있다.
태풍의 중심에 고요함이 있는 것처럼,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내리는 상황에,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의에 거하는 자들을 위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
세례 요한과 하나님의 어린 양/ 마3:15-17 20230802
예수와 세례 요한의 만남과 그 세례는 하나님의 모든 의의 성취를 알리는 일이고, 구약과 신약을 잇고 완성하는 결정적인 예표(豫表)이다.
세례, 침례(헬라어 baptisma)는 '침수한다'라는 의미의 말이다.
예수의 몸이 물에 잠김은 장사(葬事)를 의미하고 물에서 올라오심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열린 하늘의 새 세계*[마1:26]를 예표 한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2:12]
광야에서 외친 세례 요한의 간증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와 자신이 속한 세계의 구분을 분명히 한다.
율법의 의(義)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는, 지극히 절제된 삶을 사는 세례 요한이지만, 자신의 의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없다는 회개의 메시지를 외치었다.
결국 세례 요한은 기다리던 예수를 만나고 예수의 말씀을 좇아 모든 의를 이루는 세례의 예식에 참여하였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세우신 마지막 대제사장으로, 예수는 온 세상의 죄를 대속하는 어린 양의 역할을 담당하는 예식이다.
닫혀 있던 하늘이 예수를 향하여 열렸고, 하나님께서 친히 사랑하는 자 독생자 예수를 증거하셨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한 세례 요한도 예수를 향하여 증거 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1:29]
악을 선으로 바꾸사/ 창50:18-21 20230730
창세기 50장 말씀에 죽은 시신에 향 재료를 넣는 내용이 두 번 기록되어 있다.
죽은 자를 위한 향 재료를 40일, 그리고 70일 곡하는 장례 의식은 애굽에 속한 예식이다.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준수해야 할 규례라고 할 수 없다.
이 땅에 속한 애굽인의 사자(死者)에 대한 기대와 소망의 연출일 뿐이다.
무덤은 더러운 것을 처리한 곳이다.
예수께서 말씀 하신 '회칠한 무덤'과 '평토장한 무덤'은 더러운 것을 꾸미고 가리는 외식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창세기 50장에는 급속히 세속화 되어 가는 야곱 족속이 그려져 있다.
더더욱 암울케 하는 일은 요셉을 울리는 요셉의 형들이다.
야곱에 이어 요셉을 통하여 나타낸 하나님의 경륜은 무지개 약속과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구원을 이루신 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의 마음에 암울한 먹구름만 가득하다.
향품을 들고 예수의 무덤을 찾는 여인들의 마음*[눅24:1]에도 어두움이 가득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약속대로 부활하시고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 주시며 어두움에서 빛으로 이끌어 내셨다.
지금 애굽으로 옮겨진 야곱 족속에게 어두움이 가득하다.
그러나 어두움이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의 언약은 별처럼 반짝인다.
산에 올라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학1:3-11 20230726
약 2500여 년 전,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를 통한 계시로 재건된 스룹바벨 성전은 이전 솔로몬 성전에 비하여 비록 외형은 보잘 것이 없지만*[학2:3}, 그 재건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은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학2:9]
이 말씀 속에 "만국을 진동시키고 만국의 보배가 될 성전"*[학2:7]은 눈에 보이는 외형이 있는 성전이 아니라 오실 그리스도와 교회임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70년간 바벨론에 포로로 갇혀 있는 백성을 이끌어 내어 예루살렘으로 옮기시고 훼파된 성전을 다시 짓게 하시는 일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 대속의 은혜와 거듭난 성도의 삶으로 재현될 수 있다.*[요2:19, 엡2:21]
예루살렘으로의 귀환과 훼파된 성전의 재건은 나뉠 수 없는 하나님의 동일한 약속 안에 있는 것처럼, 대속의 은혜와 구원, 그리고 거듭난 성도의 삶은 나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다시 밟은 하나님의 백성은 판벽한 집에 머물며 성전 재건의 시기를 스스로 정하려 하고 있다.
이는 대속의 은혜만을 맛보고 다시 육신에 머물러 있는 백성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네 소위를 살피고,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신다.
자기 집에 빠른 발의 결과는 허공을 밟는 삶*[고전9:26]이고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하는 삶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삶이다.
성전을 짓는 일은 '오늘' 짓는 일이고 '오늘' 성전이 되어가는 일이다.*[엡 2:21]
지금 성전 지을 날을 계산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산에 오르기 싫어서 판벽한 집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지금 육체가 요구하는 방향에서 돌이켜 육체가 싫어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방향으로 올라간다면, 이는 허공을 밟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삶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고전3:10-17 20230723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하면 떡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그러하고*[롬11:16],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면 성도도 그러하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오늘날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성도들이다. *[고후6:16, 엡2:21]
그런데 교회 안의 시기와 분쟁이 있다면 이는 육신에 속한 일이고, 성전을 더럽히는 일이다.
이 더럽힘의 정체는 육신을 신뢰하는 허구의 세력이고, 세상의 지혜로 육신을 세우려는 활동이다.
교회 안에 육신에 속한 세상의 지혜로 세워진 더러움은 하나님께서 소멸하신다.
더럽히는 일이 없을 수 없으나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교회는 각 성도의 은사와 섬김을 통하여 교회가 회개하여 거룩함을 유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함께하는 자들이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고 교회이다.
성전을 더럽히는 일은 이 거룩한 터 위에 소멸될 가증한 세력을 세우려는 일이다.
터가 그리스도이면 그 터 위에 세워질 수 있는 유일한 집은 교회이다.
만일 교회 위에 아볼로나 바울이나 사람이 세워지면 이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가증하고 인위적인 종교 단체이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엡 2:2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 안에 태어난 새 생명은 성전의 한 부분이다.
바울도 베드로도 오늘 태어난 새 생명도 한 부분이다.
서로 귀중하고 보배로운 지체이다.
이 지극히 아름다운 영역을 지키는 보혜사 성령은 영과 육의 분별로 육신의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한다. *[고전2:13-14, 계2:7]
그리고 성령은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여기는 분별과 거룩함을 누리는 지혜와 교회를 섬기는 은사와 성도와의 교통을 주관한다.
육체뿐이라/ 시78:34-40 20230719
애굽 왕 바로가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에 일시 굴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놓아 보내었다.
그러나 곧 후회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잡으려고 뒤쫓아 갔고, 결국 홍해에 수장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잃는다면, 하나님 없는 바로와 다를 것 없는 육체뿐인 인생이다.
"육체뿐이라"는 말은 육체와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육체만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품고 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없다.
'육체'에 하나님의 생기를 담지 못하면 그 육체는 가고 오지 못하는 바람이고 지나가는 그림자이다. *[시144:4]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시78: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기대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진노를 다 발하여 멸하시지도 않으신다.
그들은 육체뿐인 인생이기 때문이다. *[롬8:7]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인간이 세운 장막을 떠나시고 에브라임 지파에서 유다 지파로 홀을 옮기셨다. *[창49:10]
새 언약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시다. *[히8:8]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긍휼)니라 [사55:3]
대제사장의 판결 흉배 안에 '우림과 둠밈'이 없으면 모양 뿐인 제사장이지 더 이상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니다.
하나님께 가장 가증한 존재는 '무늬만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백성의 정해진 결과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늬뿐인, 육체뿐인 헛것들"을 위한 기이한 구원을 준비하셨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시2:4-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