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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학고레/ 삿15:14-19 20220525

여호수아가 죽고 바알을 섬기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에 지배당하는 삶을 살게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대적의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세워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이다.

삼손이 나귀턱뼈로 블레셋 사람 일천명을 죽인 후 심히 목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 레히의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어 물을 마시게 하셨다.

 

여호와를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나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삼손에게나 여호와를 향한 '부르짖음'은 살아 계신하나님을 경험케 한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부르짖음'이 없다면,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냈던지, 아니면 가나안 족속과 상관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사는 자가 아니겠는가?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엔학고레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20220525엔학고레Artist Name
00:00 / 35:45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 요5:35-39 20220522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행 18:25)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이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주었다.

 

세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거는 모세의 율례를 근거로 한 육체와 세상에 대한 예법이고 개혁할 때까지 유효한 모형이다. (히9:1-10)

 

더 큰 증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그 영역을 달리한다.

이 영역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세계(히9:11)이고 더 이상 육체의 분별이나 지혜를 요구하지 않는영역이다.(고전2:9-10, 12:3)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5)

 

율법의 증거는 모든 인생이 하나님 앞에 죽어 있는 사실을 알게 해 주고, 이 증거가 있는 자에게 더 큰 증거인 하나님 아들의 음성이 들린다. (요5:46)

 

죽은 자가 살아나면 부활이고 영생이다.

새로운 영역의 삶이다.

20220522요한의증거.aifcArtist Name
00:00 / 36:00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고후2:14-17 20220518

문둥이 시몬의 집에 예수께서 계실 때, 한 여인이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마26:6)

 

향유 냄새가 그 집에 가득하였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냄새가 향기롭지만은 않았다.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마음을 향기로운 것으로 받으실 수 있었지만 제자들에게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인이 알게 된 예수는 자신의 모든 죄와 허물을 처리해 주시려고 잠시 후 십자가에 오르실 분이다.

 

여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자연스레 향기로 반사되어 나타난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는 마치 엄마의 사랑 안에 안겨 있는 젖먹이가 뿜어 내는 젖냄새와 같다.

결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냄새가 아니다.

 

악취만 가득하던 문둥이가 사는 집에 예수가 오셨을 때, 그리스도를 알게 된 한 여인으로 인하여 그 집은 향기로 가득차게 되었다.

20220518그리스도를아는냄새Artist Name
00:00 / 40:15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창15:3-7 20220515

아브람의 마음에 자리잡은 자신의 상속자는 엘리에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의 마음에 받아드리기에 어려운 후사에 관한 계획을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아브람은 흘러가던 생각의 방향을 달리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자신의 익숙하고 헤아릴만한 세계에서, 다 헤아릴 수 없지만 하나님의 제시한 세계로 방향을 달리하는 아브람의 마음을하나님은 보셨다.

 

성경은 이 상황을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 믿음은 아브람의 원래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에 익숙한 흐름에서 방향을 달리하는 마음에 형성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믿음의 원어 '아만 @m'a {aw-man'}'이 이사야 30장 21절에서는 '오른편 길을 취하다'는 의미로 기록되어 있다.

 

이 믿음의 삶은 자신의 생각에 익숙한 삶의 방향에서 역주행 하여 하나님이 준비한 세계에 몸과 마음을 던지는 삶이 아닌가?

20220515아브람이여호와를믿으니.aifcArtist Name
00:00 / 42:16

아들의 향취/ 창27:24-29 20220511

[아들의 향취/ 창27:24-29]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말을 좇아 자신을 장자인 형 에서의 모습으로 꾸미고 아버지 이삭 앞으로 나아갔다.

 

아버지께 준비되어 있는 아들을 위한 복은 '아들의 향취'와 만난다.

 

야곱이 아버지로부터 축복받기 위하여 준비된 모든 것은 어머니 리브가에 의한 것이다.

야곱이 스스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찌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그러나 야곱은 어머니의 말을 좇아 아버지 앞으로 나아갔다.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도 비로소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는 자임을 알게 되었을 때 준비되어 있는 축복의 세계가 열렸다.

 

아들의 자격이 없는 자가 아들의 자격을 얻고 누리는 축복이 세계가 있다.

 

養子가 義父를 향하여 '아들의 향취'를 발한다면 義父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향취'를 기뻐하신다. (마3:17, 습3:17)

20220511아들의향취Artist Name
00:00 / 41:16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3:1-5 20220508

라헬은 야곱에게 속한 아내의 신분이지만 야곱에 속한 삶을 누리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오른손의 사역은 라헬에게 여상하지만 라헬의 삶의 여정은 괴로움으로 막을 내린다. 

 

라헬은 하나님이 손 안에 옮겨진 은혜의 세계를 누리지 못하고 육체의 욕망에 휘둘린 삶의 본이 되었다.

 

 

'세상 끝'에 단번의 제사로 죄를 없게 하신 예수와 함께하는 사람은 자신도 '세상 끝'에 예수와 함께 장사된 자이다. (히9:26)

 

'세상 끝'에 육적 몸을 벗은 자(골2:11)는 육적 세력(虛勢)을 '죽은 것', '벗은 것'으로 취급하며 산다.

 

'세상 끝'에 육체의 삶이 끝이 났다.

 

그리스도 안에 새로 피조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을 영적 출생일로 공유하며, 이 새 날을 사는 자에게 육체로 마치는(kjv완전해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라헬의 삶은 어리석었지만, 그녀가 야곱에게 속한 아내의 신분은 여전히 유효하다.

20220508육체로마치겠느냐Artist Name
00:00 / 34:05

회개/ 눅13:1-5 20220504

이방인들에게 지배를 당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제사에 제물로 소모되는 이스라엘의 상황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능욕이고 고통일 것이다.

 

그러면 이 재앙의 끝은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국가를 회복하는 일인가?

 

예수께서 제시한 해법은 고하고 묻는 사람들의 요구와는 결을 달리하고 있다.

 

재앙의 진원은 '회개치 않음'에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세력 아래 다스려져서 하나님의 세력을 품고살지 못하면 그 곳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신28:15-68)

 

하나님의 세력을 얻지 못하는 것이 재앙이라면, 무엇이 그 세력을 얻고, 품지 못하게 하는가?

 

재앙의 진원지는 로마 세력이 아니고 망대가 무너진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세력을 얻고 누리지 못하게 하는, 회개치 못하게 하는 세력에 속한 곳이다.

 

그리고 '회개'는 잃었던 하나님의 세력 아래로 돌아가는 일이다.

20220504회개Artist Name
00:00 / 50:53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요2:1-5 20220501

가나 혼인 잔치 중에 예수의 때는 어느 때인가?

 

예수께서 포도주가 모자란 잔치집에서 포도주를 물로 만들어 즐거운 잔치가 되게 하셨다.

 

예수의 때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일, 기쁘고 즐거운 잔치를 지속케 하는 일이라면, 이 때를 위하여 준비된 '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고, '아구까지 채울 물'이 있었고, '말을 듣는 하인'이 있었다.

 

이 잔치집에 포도주가 바닥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상기 세 가지가 준비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예수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신랑되신 예수와의 혼인 잔치를 누리는 삶일진데, 오늘 나는 기쁨과 즐거움 주는 '물로 만든 포도주, 예수의 때'를 누리고 있는가?

20220501내 때가 아직.aifcArtist Name
00:00 / 48:11

가운데 섰는 여자/ 요8:3-9 20220427

예수께서 성전에 계실 때,

 

간음 중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끌려 왔다.

지금 이 곳은 모세의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세력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현장이 되었다.

 

사람들의 손에는 여인에게 던질 돌이 준비되어 있었고, 사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중에는 이 돌이 예수를 향하고 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이어 여인에게 하시는 말씀은 거칠고 두려운 세력의 그 공간을 다른 세력으로 채웠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육체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 마음에 생명의 세력이 준비되어 있다.

 

돌을 들었던 사람들은 율법에 의거한 삶을 살고 있지만 지극히 중요한 상황에서 법을 떠나 양심에 다스려져 물러갔다.

 

그러나 저주 뿐인 인생의 실체가 드러난 여인과 예수 그리스도만의 이 곳은,

 

번제단을 통과한 자의 '죄를 속하는 곳' 속죄소(贖罪所)이고 '은혜를 베푸는 자리' 시은좌(施恩座)이다.

 

예수와 그 가운데 있는 여자가 선 곳,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이룬 곳이다.

20220427가운데섰는여자Artist Name
00:00 / 44:00

아직도 상거가 먼데/ 눅15:20-24 20220424

둘째 아들의 회개된 마음과 이 아들을 위하여 준비된 아버지의 마음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라는 말에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둘째와의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라 그 마음의 격차를 읽을 수 있다.

 

둘째 아들이 겪은 고난과, 결국 깨닫게 된 자기의 모습과, 아버지를 기대하는 마음은 실제로 아들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고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에 다 미치지 못한다.

 

다 미치지 못한 회개이지만 아버지께서는 둘째를 측은히 여겨 달려가야만 하였다.

 

회개가 완성이 아니다.

그 회개를 측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구원을 이룬다.

 

입을 티끌에 댈찌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찌로다 (예레미야애가 3:29)

 

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은혜로 자기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티끌의 위치를 회복하였다 할지라도 아직 상거가 멀다.

 

"나의 회개는 완벽하다!"라고 스스로 외치는 자들은 없지만, 자기의 회개를 은근히 자랑하는 자들이 있다.

패역하고 가증한 자기가 자랑스러울 수 없고 이를 알게된 것이 자랑스러울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측은히 여겨주신 결과다.

20220424아직상거가먼데Artist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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