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앙이 지나기까지/ 시편 57편 20220907
자신이 섬기던 사울왕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재앙은 다윗으로 하여금 주의 날개 그늘로 피하게 하였다.
그 곳에서 다윗은 '자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구하고, 결국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가 다윗의 마음을 덮으면서, 그 재앙에서 벗어난 확정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었다.
사울은 다윗의 재앙인가?
사울이 제거되면 재앙도 사라지는 것인가?
다윗에게 임한 재앙의 세계는 매우 구체적이다.
날카로운 칼과 같은 이빨과 혀로 자신을 삼키려는 자의 비방, 그리고 다윗의 혼은 사자 사이에 있고 불사르는 자 중에 누었다.
그러나 다윗을 삼키려는 비방이 다윗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이길 수 없었다.
이 두 세력의 부딪침의 결과는 인자와 진리의 하나님을 확인하고 높히고 찬양하는 다윗의 노래가 되었다.
부활의 권능과 고난/ 빌3:10-12 20220904
부활을 모르며 예수를 안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수를 믿지만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자의 믿음 안에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함께하고 있는 자신이 있어야 한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은 아직 몸의 부활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영혼의 부활(죄사함/ 죄인이 의인이 되는), 거듭난 삶의 권능을 누리는 자들이다.
그리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印)처진, 예수의 흔적(갈6:17)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함께하는 고난이 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1:24)이 있다.
이 고난을 통하여 부활의 권능을 체험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뚜렷이 하는 삶,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붙잡는 삶은 영광스런 고난에 참여하는 삶이다.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룻4:17 20220831
사사들이 치리하는 시대, 엘리멜렉 가족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에 이주한 삶의 결과, 엘리멜렉과 두 아들은 죽고, 뒤에남은 세 과부들에게 새로운 삶과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의 선택은 베들레헴으로의 귀향이었다.
나오미의 선택은 룻기 말씀 속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터닝 포인트이다.
나오미는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규례에 이끌렸고 하나님의 권고하심에 소망을 두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이 선택은 남편과 두 아들의 선택과 방향을 달리 한다.
엘리멜렉은 모압을 택하였고, 아버지의 죽음 뒤에 두 아들의 결정도 여전히 모압에 머무는 삶이었다.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의 날이 끝이 나고 나오미 가족의 삶과 선택의 결정권이 세 여자에게 옮겨졌다.
나오미의 결정은 모압을 떠나는 것이었다.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결정과 잠시 함께하였으나, 시어머니가 제시한 하나님의 규례는 감당할 수 없어 모압에 머물고 말았다.
룻의 선택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같이 한다.
그녀에게 모압은 떠나야만 하는 대상이다.
이는 나오미와 함께하는 10년의 시간 속에 새겨진 것이고, 나오미의 하나님을 알게 된 결과이다.
나오미의 하나님은 모압을 떠나게 하였고, 하나님의 것에 다스려지는 나오미의 삶과 선택은 룻을 얻었게 하였다.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 족보 속의 아기를 품는 양육자가 되었다.
자랑/ 렘9:23,24 20220828
여호와가 자랑인 사람이 있고, 여호와를 아는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자랑이 된 자는 자기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고 즐거워 하며 살 수 있다.
그러나 자랑의 중심에 자기가 세워진 자들은 자기 행위를 통한 만족을 기대한다.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는 승전가가 사울에게 심히 불쾌하게 들리는 것은 사울의 마음 중심에 자기가 높이 세워져 있다는 증거이다.
라헬은 하나님의 권고하심으로 생명을 잉태하고 두 아들을 얻는 은혜를 입었으나 괴로움이 그녀의 삶의 마침이 되었다.
사울의 고통과 라헬의 괴로움은 그 진원이 어디인가?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된 바리새인은 세리와 같지 않은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고개를 들 수 없었던 세리는 결코 자신이 자랑스럽지 못하다.
이런 세리가 얻은 하나님의 의롭다는 판정은 세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결정'으로 새겨질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의 것과 다른, 자신의 행위와 상관 없는 자랑스런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이미 하나님은 자랑이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고후3:5)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29-34 2022082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표상(表象)이다.
이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구원의 사역은 세례(침례)라는 예법과 그 의미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세례(침례)의 헬라어 '바프티스마'는 '침수한다'는 의미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사는(롬 6:4) 삶을 나타내는 예법이다.
침례가 엣 사람(롬6:6)인 육신에 속한 개인의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삶의 부활을 의미할진데, 바울은 이를 자랑으로 여기며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거짓이고, 우리의 믿음도 거짓이다. (고전15:16)
이 땅에 사는 동안 부활에 참여하는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마16:24), 그리고 성령에 이끌리는 삶이 아니겠는가?
새로운 피조물/ 고후5:14-17 20220821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여전히 입고 있는 육신의 장막을 인한 탄식과 이 탄식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는 성령과 생명의 세력을 경험한다. (사35:10, 51:11)
이 땅에 피조된 인생은 자신이 자신을 위하는 삶을 살지만, 약속의 성령으로 인(印) 처진 새로운 피조물은 자신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산다.
하나님과 결코 화목할 수 없는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새로운 피조물의 삶의 동력이다.
하나님과 화목된 자는 그 분이 공급하는 분별과 힘으로 새로이 피조된 삶, 화목케 하는 직책을 가지고 산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는 새로이 피조된 자의 마음 안에 함께 한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리스도인의 육신에 속한 것들은 죽었고, 그리스도인은 독생자 예수의 형상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양자이고 새로운 피조물이다.
죄의 정욕, 영의 새로운 것/ 롬7:5-6 20220817
예수께서 십자가에 오르시는 일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에게도 함께하길 부탁하였으나 제자들은 깨어 있지 못하고 잠이 들어 버렸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말씀하셨다. (마26:41)
마음의 원함을 성취하여 줄 힘이 육신에 없다는 말씀이시다.
베드로의 원함은 목숨을 바쳐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었는데, 베드로의 육신은 그 원함을 성취하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쪽으로 베드로를 끌고 갔다.
베드로의 정체는 무엇인가?
로마서 7장은 이 '마음의 원함'과 함께하는 '죄의 법'의 세력을 자세히 설명하여 준다.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에 악이 함께 있어서 원하는 바 선을 행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육신에서 형성되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마음은 죄의 정욕이고, 이 정욕을 따라 할 수 있는 일은 가증한 종교 활동뿐이다.
오직 육신의 원함에 세력에 갇힌 자, 사망의 몸에 갇혀 있는 자의 탄식을 들으시는 하나님(시102:20, 사42:7)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영의 새로운 것으로 이끄시며 함께하신다.
복음의 광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고후4:3-6 20220814
하나님은 홀로 선하시다. (마 19:17, 롬3:4)
성경은 성경의 증거와 성경의 논리로 해석되어야 한다.(사34:16)
그리고 그 모든 해석의 일관된 결론은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에 이른다. (요5:39, 계21:22)
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좁은 문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마7:14)
이 규례는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자의 시각으로는 일방적이고 독선(獨善)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말씀에 이끌림을 받는 자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영역의 시각, 거듭난 영역의 시각이 필요하다. (요3:3)
그리고 그 시각을 얻은 자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본다. (요4:29)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창1:3)"는 말씀을 시작으로 성경에 기록된 일관된 증거는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이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사 9:2)
歡迎光臨!
복음의 광채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자의 마음에 비취었다.
두 아들, 세리와 창기/ 마21:28-32 20220810
아버지를 향하여 뉘우칠 것이 있는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세리와 창기는 요한의 의의 도 앞에 뉘우침이 있었고, 그 뉘우침은 요한의 도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다.
누가복음15장의 두 아들에게도 자기의 뜻을 돌이키는 뉘우침이 중심 내용 중 하나이다.
이 돌이켜 뉘우치는 세계는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렸다고 동생을 질책하는 믿아들에게 경험되지 못한 세계이다.
세리와 창기는 아담에 속한 모든 인생의 DNA에 기록되어 있고 준비되어 있는, 조건이 형성되면 나타나게 되는 속성이다.
그리고 이 근본의 세력에 대한 분별과 믿음의 반응은 하나님과 사귐의 시작이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9:13)
작고도 지혜로운 것/ 잠30:24-28 20220807
잠언 30장, 아굴의 잠언은 자신의 무지함과 연약함에 대한 간증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 바라고 구하는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헛된 것과 거짓말을 멀리하는 삶이고 둘째는 가난도 부요함도 아닌 필요하고 적당한 양식이 있는 삶이다.
자신은 배부르면 하나님을 모른다 하고, 가난하면 도적질할 인생임을 고백한다.
이 투명하고 정직한 아굴의 간증에서 우리는 큰 공감과 가르침를 얻을 수 있다.
아굴의 구하고 누리려는 세상은 무사태평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이다.
이는 지극히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육신의 지혜(약3:15)에 익숙한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얻고 누리는지혜이다.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에게서 풍요로울 때 말씀에 가까이 하고 마음에 담아 놓는 그리스도인의 지혜를,
약한 종류이지만 바위 사이에 집을 짓는 사반에게서 견고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지혜를,
임군이 없으되 떼를 지어 사는 메뚜기에게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르는 지혜를,
손에 잡힐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에게서 연약하지만 왕자의 명분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