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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으라/ 요20:19-23 2023021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그러나 제자 중에 이 말씀을 믿거나 삼 일(72시간)을 헤아리고 고대하며 부활을 기다린 자는 없었다.

겨자씨만큼의 믿음을 가졌다면 제자들의 모인 곳의 문빗장을 질러 놓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닫힌 공간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먼저 평강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부탁하신다.

 

지금 부활하신 예수 앞의 제자들은 어떠한가?

 

비록 부활의 예수를 직접 보게 되었을지라도, 도마처럼 손과 옆구리의 상흔에 손가락을 넣어 확인하였다 할지라도 성령을 받아 그 세력에 이끌리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눅16:31]

 

본 것을 의지하는데 익숙한 인생*[골2:18]에게 본 것을 의지하여 형성된 믿음이 제자들의 마음에 있다.

이 믿음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시각과 촉각 등의 감각과 그 감각을 근거로 형성된 생각을 의지한다.

도마의 믿음은 자기 판단의 결과이지 말씀에 다스려진 영적 결과가 될 수 없다.

 

성령의 이끌림은 '듣고 믿음'으로 된 결과이고 믿음의 실현이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하셨고 이 말씀이 곧 영이고 생명이다. *[요6:63]

제자들은 들었으나 그 마음에 말씀을 믿는 믿음이 형성되지 못하였다.

제자들의 생각을 따라 만들어진 믿음이 "다시 살리라"는 말씀을 삼켜 버렸다.

 

예수의 죽으심은 제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육신의 정욕으로 기울어진 모든 인생의 불의함을 짊어 진 하나님의 어린 양이 아닌가?

 

예수께서는 땅에서 들리실 때,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인생의 불의가 드러났고 심판을 받았다. *[요3:14,15, 요12:32]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육신의 기울어진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으라"

 

숨을 내쉬는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탄식(?)하시며 부탁하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말씀대로 부활하셨다.

믿음대로 부활하셨고 성령의 역사 안에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고전15:20]

다음은 우리다.

20230215성령을받으라Artist Name
00:00 / 41:58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창9:18-27 20230212

하나님은 육체를 저주하셨다. [창6:3]

 

노아는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는 홍수의 저주 가운데 방주를 준비하신 하나님의 구원에 이끌림을 받았다. [창7:2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함을 인하여는 더 이상 저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창8:21]

또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아들들을 축복하시면서 이후에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는 언약을 하신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창9:13]

 

이는 홍수의 저주을 이긴 방주, 먹구름의 저주을 이기는 무지개 약속이고 육체의 저주를 이기는 구원의 예표(豫表)이다.

 

포도주에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아비 노아의 하체를 본 아들 함은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고, 형제들은 옷을 취하여 뒷걸음으로 아비에게 다가가 하제를 덮어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다.

 

다윗의 허물을 본 미갈처럼[삼하6:20] 함은 아비의 허물을 보았고 그 허물을 형제들에게 고한다.

함은 아비의 허물을 보았지만 그의 행위에서 허물밖에 없는 모든 인생의 저주와 이 저주를 이긴 은혜의 방주와 무지개 약속을 찾아 볼 수 없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3:21]

 

노아가 육체의 더러움이 없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어 구원을 받았다.

셈과 야벳과 함도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노아의 아내와 며느리들도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표면적으로 아비와 아들과 처와 며느리의 관계이지만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혜로 낳은 '은혜의 아들들'이다.

이 기준을 가나안에게 적용하면 가나안도 은혜의 아들이다.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마23:9]

 

셈도 야벳도 아들을 낳았지만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는 말만 두번(18절, 22절) 기록된 점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노아는 함의 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하였다.

저주의 내용은 마땅히 누려야 할 '셈의 장막'을 잃고, 형제 관계에서 종의 신분으로 옮겨지는 일이다.

 

셈의 장막은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를 의미한다. [히12:23]

 

노아와 셈과 야벳은 이 은혜를 누리는 마음으로 장막에 함께 할 수 있지만 함의 모습은 그 은혜와 구원의 세계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아비의 형상만을 나타내는 가나안이라면, 은혜의 세계를 깨닫지 못하고 무지개 약속과 상관 없는, 육체뿐인 인생의 수고만이 그의 전부가 아니겠는가?

20230212함은가나안의아비라Artist Name
00:00 / 46:57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 롬1:1-6 20230208

로마서는 바울 자신과 성도(聖徒)들이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기록으로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약속의 현현(顯現)이다.

그리고 부활이라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부를 수 있는 특권은 이 사실이 믿어진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운 권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고전3:23]

이는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회복된 결과이다.

 

하나님의 것이 된 자는 이전에 하나님이 아닌 것에 속하였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엡2:2-3]

 

하나님의 것이 되었으면, 그 존재의 근거와 보장(保障)과 결과가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의 것이 된 자는 자신이 자신을 지키고 자신이 자신을 세우고 자신이 자신의 장래를 염려하는 수고에서 벗어난 삶을 산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벧전2:9]인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복음을 전하는 자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는가를 전하는 일이다. [고전15:10]

그리고 복음에 합당한 삶은 복음의 시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된 자의 삶을 사는 일이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후4:5]

 

복음을 인하여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바울은 신령한 은사(영적 선물)를 전하려 한다.

그 은사는 복음이다.

이 복음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것임을 견고케 하는 하나님의 지혜이시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고전9:14]

20230208그리스도의것으로Artist Name
00:00 / 52:54

세 벗/ 눅11:5-8 20230205

세 벗이 있다.

먼저, 여행 중에 찾아 온 벗이 있고, 찾아 온 벗을 위하여 늦은 시간이지만 떡이 있는 벗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려 강청함으로 떡을 얻는 벗이 있고, 그리고 뗙이 있는 벗이 있다.

 

순서대로 이 세 벗을 A, B, C로 명한다면, C는 떡이 있는 벗, B는 A를 위하여 떡을 구해 주는 벗, A는 은혜를 입는 벗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성도의 모습은 A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떡이 '생명의 양식'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세 친구의 관계는 성도의 삶을 설명하여 주고 방향을 제시하여 준다.

 

B는 예수와 보혜사 성령의 형상이다.

A는 B의 공로로 생명을 얻었고 B의 섬김으로 그 은혜를 누리며 산다.

B의 강청함은 닫힌 문을 열게 하였고, A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여 준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8:26]

 

성도를 위한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누리게 한다.

거룩함을 입은 성도의 삶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보장(保障)이 되며, 그 보장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나타내는 삶이다.

20230205 세 벗Artist Name
00:00 / 1:00:03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눅12:1-5 20230201

예수의 말씀(눅12:4-5)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에 집중하고 있다.

이 말씀은 수만 명의 무리가 예수께 나아올 때, 제자들에 주신 주님의 경고이시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외식과 감추고 숨긴*[시90:8] 위선(僞善)을 지적하시고 그 결과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지옥'의 헬라어 '게엔나'는 히브리어 '게힌놈(힌놈의 골짜기)'의 음역이다.

'게(골짜기)'의 어원에 '교만'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문자에 담긴 의미가 어찌되었든, 예수께서 '영원한 형벌이 행해지는 장소'의 의미로 말씀하신 '지옥'은 열번 이상 성경(개역한글)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기록된 '지옥'이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과 죽음 후의 일을 두려워하는 것은 다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육체'에 관한 일이고, 죽음 후의 일을 두려워하는 것은 영혼에 관한 일이고 하나님의 심판에 관계된 일이다. 곧 죄와 지옥에 관한 하나님의 형벌이다. *[전3:20-21]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며 육체를 세우는 자의 '외식과 위선'은 '하나님을 향한 교만'의 구체적인 행태이다.

이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은 지극히 단호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향하여 나아올 때, 예수께서 제자들의 향한 마음과 교훈은 "하나님을 두려위하라"이다.

오늘날 예수를 찾는 이들 앞에 예수를 전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가 아닌가?

20230201하나님을두려워하라Artist Name
00:00 / 56:27

저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롬1:28-32 20230125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는 자들의 불의(不義)는 결국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내고, 그 우상은 하나님을 상실한 자의 마음에 자리잡고 합당치 못한 일들을 토해 낸다.

 

불의, 추악, 탐욕...... 등이다.

 

이 사형에 해당하는 삶의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지적은 '열매로 나무를 아는' 것과 같이, 행위의 시작인 마음의 세계를 설명하여 준다.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의 마음에 이미 '스스로 원하는 하나님(우상)'이 만들어져 있다.

 

이 허상의 세력은 가식과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마음에 할례가 되지 못한 유대인에게 할례는 훈장이고 계급이 되었다.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는 표시의 할례가 육체를 자랑하는 장식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진리를 상실한 자의 모습이고 지극히 가증한 종교적 행태이다. *[빌3:2-3]

 

예나 지금이나 모든 육체의 요구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자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원하는 인생은 있어도 스스로 성취한 인생은 없다. *[마26:41,롬7:18]

마음에 똬리치고 있는 우상과 육신의 욕망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 탄식을 감사와 찬양으로 바꾸어 준다.

20230125마음에하나님두기를Artist Name
00:00 / 38:28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 롬1:17-23 20230122

불의(不義)는 하나님을 향하여 옳지 않은, 죄의 총칭이다.

알든 모르든 죄인은 불의를 행하는 자이고 하나님의 의를 거부한다.

 

죄인은 아담 안의 모든 인생의 타고난 신분이고 하나님을 향하여 불의한 자들이다.

이 불의한 자를 위하여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다.

 

복음에 나타난 두가지 하나님의 의에 다스려진 사람은 '의롭다'고 인(印)쳐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롬3:21,22,엡1:13]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요5:46]

 

이렇게 의인(義人)의 신분은 다스려지고 믿어진 결과이지 행위의 산물이 아니다. *[롬4:2,갈2:16]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사 55:7]

 

이 불의는 육체의 생각을 통해 나타내는 선천적 세력이다.

예수께서 이런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벧전3:18]

 

그러나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과 함께하지 못한 결과물이다.

 

이 복음은 오늘도 의인에게 여전히 유효하고, 불의한 자들을 향하여 팔을 벌리고 있다. *[롬10:21, 사65:2]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거룩되게 하라 [계 22:11]

20230122불의로진리를막는Artist Name
00:00 / 42:03

장막 집이 무너지면/ 고후5:1-5, 계21:1-4 20230118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 입을 마음을 갖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육신에 대한 인식이 새로 입을 옷에 대한 기대나 소망을 만들어 줄 것이다.

 

육체라는 장막이 무너지기 전에, 이 땅에 잠시 머물다 가는 그리스도인이 덧입는 옷이 있다.

 

덧입는다는 뜻은 입고 있는 옷 위에 겹쳐 입는 것이다.

이 덧옷은 성도들의 육체를 제어하는 전신갑주(엡6:11)가 아니겠는가?

 

이 옷을 통하여 나타나는 생명의 세력이 성도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그 나라, 새 하늘과 새 땅(계21:1-4)을 누리게 한다.

 

그 곳에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과 같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 예루살렘이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는 세계이다.

 

몸은 아직 이 땅에 있지만, 마음은 그 세계를 누릴 수 있다.

이 땅에서 그 나라를 맛 본 자에게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는' 사건은 어떤 의미인가?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시116:7-9,15]

20230118장막집이무너지면Artist Name
00:00 / 51:22

지극히 작은 자/ 마25:40-46 20230115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심판은 영영한 불에 들어가는 것이다.

염소는 마귀의 사자에 속한 영벌을 받게 되었다.

이 심판의 결정적인 근거에 '지극히 작은 자와의 관계'가  있다.

 

"너는 나를 공양하였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양(羊)은 동의할 수 없었고, "너는 나를 공향하지 않았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염소도 동의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공양의 증거와 심판의 근거를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것으로 옮기셨다.

 

땅 위에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막4:31)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설명하여 주고 있다.

그리고 흠모할 것 없고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된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의 형상이다.

 

이 '지극히 작은 자'의 형상으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1-12]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신 예수를 영접한 죄인은 의롭다는 하나님의 판정을 받는다.(마9:13, 롬3:28)

 

영접하는 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을 얻는 자는 '예수'라는 이름이 믿어진 자들이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눅18:9-14)는 염소와 양의 세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바리새인과 같은 부요함으로는 바늘 구멍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문(눅18:18-30)을 통과할 수 없다.

그러나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는 세리는 '의롭다'는 판정을 받는다. 

 

헬라인이고 수로보니게 족속인 한 여인(막7:26)은 그 마음이 부서지고 깨어져 오직 긍휼을 구하는 마음으로 예수 앞에 나왔다.

'지극히 작은 자'이신 예수와, '하나님의 긍휼' 외에 다른 소망이 없는, 산산히 부서진 가난한 여인이 만났다.

 

결국 예수는 여인을 위하고, 여인은 주를 위한 관계가 되었다.

20230115지극히작은자Artist Name
00:00 / 46:37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0-26 20230111

창세기 4장에는 가인과 가인의 후예(後裔)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의 주장(主張)이 지면(紙面)을 진동한다.

 

가인의 주장은 아벨을 죽일만큼 강하였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 자신이 자신을 지켜야만 하는 생존의 굴레에 매인 삶을 산다.

 

가인의 5대손 라멕에 이르러 가인의 세계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난다.

아담 안의 모든 인생의 삶을 설명하여 줄 수 있는 조상들의 형상이다.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가 되었다.

 

이들의 세계는 오늘 우리 모든 인생이 겪고 있는 의식주의 기본적인 문제와,

그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다양한 욕구의 세계와,

이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방어와 공격의 상황을 예고하고 있다. 

하나님을 거절한 인생이 할 수 있는 전부이다.

 

라맥의 외침은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의 처절한 속살을 드러낸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나를 죽이는 자는 벌을 칠십 칠배를 받을 것이다!"

 

이 복수의 공격성을 증거하는 흔적들이 자신들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죽이고 죽는 인생의 마음에 "살기 위하여"라는 비진리의 세력이 덮여 있다.

 

그러나 이 절망의 현장에 소망의 불씨가 남아 있다.

소망은 아담에게 아벨 대신 '셋'을 주신 하나님의 사역이시다.

 

셋의 아들 '에노스'는 '사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다.

자신의 근본을 아는 인생은 비로소 존재의 시작이 되신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아담에게서 나온 자들의 유일한 소망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은혜와 지혜를 얻는 일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행2:21, 롬10:13]

20230111비로소여호와의이름을Artist Name
00:00 / 4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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