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 같은 것들
Digital graphics,
38.7cm x 50.2cm, 300 ppi,
2013.
2-3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들
교만
중국 장춘에 있었을 때 일이다. 1999년 쯤으로 기억된다.
장춘 교외의 농촌에 살고 계신 한 모친께서 찾아 오셨다.
얼마 전에 복음을 듣고 참 기뻐하셨던 모친이신데, 어려운 일 때문에 상의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하신다.
어려운 일은 다름 아닌 남편에 관한 일인데, 늙은 여자가 부끄러운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헤어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모친께서는 30여 년 전에 첫 남편을 잃었다.
그 때 모친의 나이 서른 둘, 남편이 남겨 놓은 아이들이 셋이 있었다.
농촌에서 홀로 된 여인이 농사 일로 이 세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앞이 캄캄했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방안이 ‘아이 없는 홀아비를 찾아 재혼’하는 일이었다. 마침 찾은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남편인데, 모친은 나에게 이 재혼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것은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
새 남편에게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습관적으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이다. 특이한 것은, 별 가치가 없는 시시한 물건들, 그러니까 머리 없는 괭이자루, 말뚝, 벼짚단. 흙소쿠리 같은 물건들이다. 가끔 주인에게 발각되어서 개망신을 당하고 때로는 공안 파출소까지 끌러가는 일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싫어하고 손가락질하고 욕을 해도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모친은 졸지에 좀도둑 마누라가 되었다.
이 좀도둑 남편이 모친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집안 살림에 대하여도 비슷한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재정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아이들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도리어 아이들이 머리가 커 가면서 새 아버지를 싫어하고 싸우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몇 번이고 이혼하려고 했지만 하지 못하고 3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모친의 마음에 남편을 향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사별한 남편의 헌신적인 삶을 회상하며 이야기 할 때에는 슬픔과 증오가 교차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였다.
흐르는 눈물을 닦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모친님, 그 동안 아이들 뒷바라지에 고생이 많으셨고, 영감님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네요."
모친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하면 뭐합니까? 아이들이 '애비 없는 자식, 과부 자식’ 소리 듣는 것보다는 낫다 싶어서 참고 살았지요. 이제는 아이들도 다 크고…, 혼자 주님 섬기며 살고 싶습니다."
나는 모친이 생각하지 못한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남편과 함께 사시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모친을 당황스럽고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선교사님, 무슨 말씀이신지…, 잘못 알아들으셨나? 두 남편이라니요?"
“모친님, 제 말이 너무 엉뚱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마는, 모친은 지금 두 남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모친이 싫어하는 좀도둑 남편, 또 하나는 모친님 마음에 우상처럼 살아 있는 첫 남편입니다."
모친과 나는 먼저 모친 마음에 형성된 갈등의 세계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았다.
마음에 함께하고 있는 옛 남편은 여전히 자상하고 부드럽다. 함께 새 남편을 싫어하고, 무시하고, 때로는 공격하기도 한다.
문제의 심각성은 좀도둑 남편보다도 모친 편에 많이 실려 있다.
모친의 마음에 있는 남편은 일루전(illusion)이다. 모친이 바라는 남편의 상(像)이고 그 생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모친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는 자상한 남편이다. 그러나 이것은 ‘허상’이고 ‘죽은 자’이고 ‘귀신’이다.
모친은 복음의 말씀에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계셨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한 사람은 그의 마음과 분별과 방법으로 살 수 있는 권세를 얻은 자이다. 그러나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할 때, 하나님은 큰 고난을 주시기도 하고 육적 어두움의 세력을 나타나게 하셔서 곤고케 하신다. <애3:33>
나는 모친께 복음을 다시 풀어 드렸다. 특히 허망한 인생과 우리의 연약함에 대하여….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시 62:9>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모친은 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가 말씀을 잊고 살았네요. 영감을 무시한 것처럼 말씀을 무시했어요. 버러지 같은 인생이 교만해서…."
모친께서 복음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자신의 마음이 높은 부분과, 하나님의 기준을 버리고 자기 스스로 만든 기준이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렘2:19>는 사실에 동의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이 감각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욱 감사한 세계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담이 첫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이름을 ‘가인’이라 하였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었다’는 의미이다. 둘째를 낳고 ‘아벨’이라고 하였다. ‘입김, 허무’의 의미를 담은 이름이다.
이름의 의미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반응하는 아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가인을 낳았을 때 만족스럽고 기대 찬 이름이 아이에게 주어졌지만, 아벨을 낳고는 실망스런 탄식이 아이의 이름이 되었다.
이런 아담의 마음을 통하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의 마음이 하나님의 결정에 순종하지 못하고 도리어 스스로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대응한다는 사실이다.
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기준, 심지어 하나님도 판단하는 세계가 ‘교만’의 세계이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사45:7>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아비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났느냐 어미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낳으려고 구로하느냐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사45:9,10>
창조주에 대한 패리(悖理)함을 나타내는 이 ‘교만’이라는 육의 세력은 죄인으로 태어난 모든 인생의 마음속에 똬리 치고 있는 죄의 한 형상이다.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시1:1>는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생들에게 주어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패망의 영역이다.
그리스도인이 복된 것은 이 패망의 영역에서 의인의 영역으로 옮겨졌다는 점이다.
말씀으로 자신의 교만을 감지할 수 있고, 자신의 근본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기의 기준을 무시할 수 있는 힘<마16:24>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