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囚人

Woodcut,

13.3cm x 20.0cm,

1987.

2-2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들

 

 

자범죄

 

 

 

 

1962년, 초등학생 1학년 때 일로 기억된다.

담임선생님께서 쥐를 잡아 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하교 길에 길거리 쓰레기장을 뒤지며 집으로 왔다. 평소 길바닥이나 길거리 공공 쓰레기 처리장에 버려진 죽은 쥐들의 사체를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은 한 마리도 볼 수 없었다. 이미 앞서 챙긴 분들이 있어서….

어머니께서는 철물점에 가셔서 쥐덫을 사오셨다. 저녁에 쥐덫도 설치하고 학교에서 배급한 쥐약도 뿌렸다. 집안에 학생이 셋이라 세 마리 이상의 쥐가 필요했다. 천장을 울리는 쥐새끼들의 달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이 들었다.

아침에 우리 식구는 한 마리의 쥐를 얻을 수 있었다. 다행히 쥐덫이 성과를 내주었다. 그러나 쥐약 먹고 죽은 쥐를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밖에 나가 한 마리를 더 구해 오셨다.

누나와 형이 가지고 갔다. 나는 빈손으로 학교를 향했다.

 

학교에 큰 소동이 일었다. 삼천이 넘는 전교생이 쥐를 잡아 오는 바람에 그 쥐들을 처리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철망으로 제조된 쥐덫 채 들고, 생포한 쥐와 함께 온 학생들도 있었다.

학교 쓰레기 처리장이 동네 쥐 공동묘지로 변해 버렸다.

종례 때 담임선생님은 업그레이드 된 미션을 제시하였다.

 

"내일부터는 쥐 꼬리를 잘라 와라!"

 

 

이 이야기는 하나님에 대한 ‘회개의 세계'를 공부하면서 기억하게 된 예화이다.

쥐꼬리 하나를 들고 선생님 앞에 가는 것은 쥐 한 마리를 잡아 죽였다는 증거가 된다.

요한일서 1장 8절 이하에 기록된 죄와 죄의 자백에 관한 내용을 설명할 때 매우 적절한 예화가 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1:8-10>

 

온전한 회개는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 <행2:38>

‘죄’에 대한 뚜렷한 분별이 온전한 회개를 이룬다.

 

“원죄는 예수께서 사해 주시고 자범죄는 믿는 자들이 신앙으로 다스려 가야 하는 몫이다.”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오랜 시간 이런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모임 안에 속해 있었다. 이는 지극히 잘못된 지식이다.

‘원죄, 자범죄’라는 단어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 말씀 속에 ‘죄’와 ‘범죄’가 있다. ‘죄’는 원인이 되는 세력이고 ‘범죄’는 죄를 범하여 나타난 결과, 보이지 않는 죄의 세력이 활동하여 표면에 나타난 결과이다. 마치 땅 속에 있는 마그마가 땅을 뚫고 분출된 ‘화산(火山)’과 같다. <욥 28:5>

사람이 스스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죄를 짓는다<롬7:17>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자범죄’는 스스로 죄를 짓는다는 생각 속에 형성된 잘못된 관념이다.

이 관념에 치우친 사람은 ‘스스로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산다. 결국 죄를 이기지 못하고 정죄 가운데 살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속한 사람은 두 부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신앙하는 힘을 잃고 죄와 욕망이 끄는 대로 몸과 마음을 던져 버리는 삶을 사는 것이고, 둘째는 스스로 죄를 다스리고 노력하는 모습을 나타내며 때로는 죄와 싸워 이겼다는 간증을 자랑하며 산다. 후자는 하나님 앞에 더욱 불쌍한, 가식되고 위선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시65:3>

 

죄악을 이길 수 없다는 다윗의 회개는 ‘죄 사함’과 연결된다.

요한일서 1장의 회개가 바로 이것이다. 자기의 ‘신분(身分)’을 알게 된 자의 고백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51:5>

 

이 회개는 범죄한 열매, 행위에 속한 죄를 들고 나아가는 내용이 아니다.

다윗은 유부녀와 간음하고 그 사실을 감추려고 그녀의 남편을 교활한 술책으로 죽음에 몰아 넣었다. 선지자 나단을 통해 이 사실을 적발하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내용이 이 시편 51편 말씀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범죄를 통해서 다윗의 마음속에 형성된 하나님을 말씀을 업신여기는 죄<삼하12:9>를 지적하시고, 다윗은 회개하여 자신의 패역한 신분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간음, 살인은 육체를 신뢰하고 섬기는 죄의 열매이다. 열매를 통하여 그 나무를 안다. 나쁜 나무가 자신이 나쁜 나무인 줄 안다면 더 이상 나쁜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 만일 나쁜 나무가 “하나님 어제 나쁜 열매를 맺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다음부터 좋은 열매 맺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셔야 하는가?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열매가 아니라 근본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섰다.

 

'쥐꼬리는 송곳집으로나 쓰지'라는 속담이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선생님이 원하는 것은 쥐꼬리가 아니다. "쥐새끼들을 진멸하는데 참여하였는가?"를 확인코자 한다. 쥐꼬리를 들고 선생님 앞에 나아가지만 그 든 것은 쥐꼬리만이 아니다. 한 마리 쥐의 죽음을 의미하고 “쥐 박멸!”에 참여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한 회개에 이 내용이 빠진 자백이라면 마치 학생들은 열심히 쥐꼬리를 잘라 오고, 동네는 꼬리 없는 쥐들이 득실거리는 현상을 상상할 수 있다.

 

회개(悔改;Repentance)는 전환을 의미한다.

둘째 아들<눅15:11-32>이 아버지를 떠날 때의 마음이 전환되어 다른 마음이 되어 돌아올 수 있었다. 떠날 때는 자신을 신뢰하는 ‘주인 된 마음’이었는데, 그 마음이 은혜를 구하는 ‘종 된 마음’으로 전환되었다.

허랑 방탕의 결국, 냄새나는 돼지우리에서 살지만 여전히 성공의 기회를 살피고, 아무리 형편이 비참해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비참한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서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비록 쥐엄 열매가 주식이 되었지만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둘째 아들에게는 돼지가 먹는 음식조차도 먹을 수 없는 참황이 연출되었다. 절망, 그리고 그 마음에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사망 앞에서 비로소 보여 진 세계가 있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는 자신, 그리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아니 멸시했던 아버지에 속한 은혜의 세계였다.

 

회개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면서 형성되는 세계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은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알 때 경험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려준다. 에서가 회개할 기회를<히 12:17> 잃었다는 뜻은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 버렸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기회를 잃은 것은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나 말씀을 무시한 결과이다.

그러니까 그 마음에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진 사람은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롬2:3>의 말씀의 인도로 회개가 이루어지고, 회개된 마음은 또 다시 준비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된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 5:32>

 

“죄인을 불러”라는 말씀에 주의하여 생각해 보면;

예수께서 “말똥아!”라고 부르면 말똥이가 나와야 할 것이고, “소똥아!” 하고 부르면 소똥이가 나와야 할 것이다. 근데 “개똥아!”라고 불렀는데 말똥이가 나오면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없는 것’ 같은 존재인데<롬4:17>,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 사람은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눅3:8>를 맺을 수 없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요1:10>

 

예수가 탄생하신 유대 땅에 아무도 탄생을 기다리고 준비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친히 멀리 동방박사를 부르시고 들에 있는 목자를 인도해 탄생을 자축(自祝)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아무도 예수와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부활하실 때, 아무도 부활을 기다린 사람은 없었다.

이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은 집요하게(?) 구체적인 상황을 성경에 기록하셨다.

 

새로 산 자동차 안에 ‘사용 설명서’가 있듯이 성경이 인간이라고 불리는 제품의 사용 설명서라면, 그 불량의 정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사용 중 반드시 ‘리콜(회개)’되어 엔진(마음) 교환(거듭남)이 필요한 제품이다.

공장에서 나온 그대로 그냥 계속 사용할 만한 물건이 못된다.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패역이 감지된 마음이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진 마음이다.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단 9:9>

 

이 하나님에 대한 패역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선 자, 하나님을 영접할 만한 지혜와 능력이 없는 ‘하나님을 영접치 아니한 백성’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인 사실이 믿어진 자가 바로 긍휼과 사유하심을 위해 준비 된 자요, 예수라는 이름이 믿어 진 ‘영접하는 자’가 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1>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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