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
Woodcut,
15.7cm x 21.4cm,
1987.
2-1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들
상상 임신
임신 41주나 되었다며 복부 통증을 호소하는 한 여인이 수술대에 올랐으나 여인의 배 속에서 태아를 찾을 수 없었다.
이 황당한 이야기는 브라질 카보프리오의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일어난 일이다.
임산부가 37세로 고령 임신에 이미 41주나 되었다는 불안한 조건들, 그리고 산모의 절박한 비명과 호소가 의사로 하여금 사전 검사를 생략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하고 그만 배를 열고 말았다.
‘참황(慘況)’이라는 단어로도 그 정도를 다 형용할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상상 임신(想像妊娠, pseudocyesis)은 스스로 임신이라고 믿음으로써 나타나는 의태(擬態) 임신을 말한다. 임신에 관한 심리적 갈등이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처 내분비계의 변화를 유발하고, 이 변화가 이차적인 여러 증상을 유발시키는 현상을 나타낸다. 일찍 정밀 진단을 통해 사실이 드러나면 쉽게 처리될 문제이지만, 임신 41주 후에, 그것도 결국 수술대 위에서 밝혀진 일이 되었다면 그 여인에 임한 정신적 육체적 쇼크는 대단하였을 것이다.
태아 없는 임신이 상상 임신인 것처럼, 생명 없는 신앙을 한다면 그 신앙도 상상 임신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하는 사람이 그 마음에 예수가 없다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상상 임신과 같은 신앙을 적발해 내고 경고한다. <고후13:5>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1-23>
이 말씀 안에 있는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상상 임신의 판정을 받는다.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많은 모양은 있으나 천국에 갈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불법을 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불법(Iniquity)은 의(義)와 대립되는 개념<고후6:14>으로 하나님의 법을 거스리는 죄의 한 형태이다.
그러니까 이 불쌍한 선지자는 하나님의 법으로 ‘의롭다’는 판정을 얻어낼 수 없으므로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된 것이다. <히1:9>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전도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나타내는 사람에게 "당신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이런 자에게 “나는 너를 의롭다고 할 수 없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자 중에도 의롭다는 판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 상상 임신에 속한 사람이 많다고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마11:6>
믿는 자 속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믿는 자 속의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만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하는 ‘죄’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 속의 ‘죄’가 서로 다른 ‘죄’라면, ‘죄’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수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잘못된 지식을 믿고 있는 자에게 하나님이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에 세워진 예수가 성경 말씀 속의 예수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열심히 믿는 것’은 나중 일이다. 먼저 ‘정확히 아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고 진리와 생명의 세계에 얻는 시작이다.
사람이 양질의 정보를 얻게 되면 믿음은 저절로 형성된다. 마치 갈릴레이가 도(道)를 닦다가 지구가 둥글고 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망원경으로 하늘의 별들을 관찰하다가 지구가 둥글고 돈다는 정보를 얻어 ‘지동설’이 그 마음에 ‘설(說)’이 아닌 ‘믿음’으로 세워진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사실을 정확히 알면 믿음은 저절로 형성된다.
성경에 기록된 ‘죄’에 대한 지식은 자기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시작이다.
성경적인 죄에 대한 지식은 예수를 아는 성경적인 지식과 연결되어 있다.
이 지식의 부재, 또는 결핍된 자의 열심은 상상 임신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이 가짜 열심은 진짜를 무시하고 증오하며 자기 옳음을 주장한다. 마치 가인처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10:2,3>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일3:12>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 11:4>
‘죄에 대한 지식…, 죄와 죄인을 설명해 주는 말씀은 성경에 가득 기록되어 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법이다. <롬3:20>
율법을 모두 다 준수하면 100점(천국에 갈 수 있는 점수)이라는 기준으로 인간을 채점하면 모두 0점이다. 이 점수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에게 유효하다.
이 법에 다스려지지 못하는 것이 불법의 시작이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3:10,11>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오,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2:13>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0>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라”<요5:46>고 하신 예수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모세를 경배하는 자가 아니라 모세에게 준 하나님의 법, 그 율법에 다스려진 심령이다.
인간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일은 마치 비닐봉지에 숯불을 담는 것과 같다<잠6:28>.
“간음하지 말라!”는 법은 우리 속에 음란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딤전1:9>,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기의 욕망에 이끌리는, 죄의 세력에 속한 자신<롬7:14>을 발견케 한다.
결국 율법은 하나님을 향한 육신의 패역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율법을 통해 영육 간에 죽음이 전부인 자신을 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예수의 음성이 들린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5>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3:21,22>
‘예수’라는 이름은 ‘죄에서 구원’<마1:20>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과 성령의 법’을 베푸셨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생명과 성령의 법’ 아래로 옮겨진 자들이다.<롬8:2> 이 두 가지 법에 온전히 다스려진 자들을 하나님은 ‘의롭다’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사42:3>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1:17-19>
누가 감히 하나님의 진리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마음에 ‘다른 진리’가 세워진 사람들, 하나님의 두 가지 법을 무시할 수 있는 다른 법에 이끌리는 불법한 심령이다. 창세기 3장에서 여자의 마음에 세워진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가짜 말씀이 진리를 무시했던 것처럼….
가짜는 진짜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