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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

Woodcut,

12.0cm x 12.4cm,

1987.

1-6.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

 

 

두 마음

 

 

 

 

사람에게 두 가지 마음이 있다.

첫째는 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다. 도덕적인 모양이나 종교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둘째는 자기를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이다. 지극히 본능적인 형태이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율법사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에서 이 두 마음의 세계를 헤아려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10:30>

 

우리에게 있는 두 가지 마음을 ‘예루살렘에 거하고자 하는 마음’, ‘여리고에 거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과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마음’<롬7:22,23>으로 설명하고 있다. 결론은 동일하게 ‘사망에 이르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속하게 되는 내용이다.

 

우리 마음에서 형성되는 ‘예루살렘에 거하고자 하는 마음’은

‘원함’뿐이지 능력은 없는 마음이다.<롬7:18>

만일 스스로 예루살렘에 거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면, 지극히 가식적이고 거짓된 종교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게 스스로 예루살렘에 거할만한 지혜와 능력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시14:2, 욥28:12, 단2:20>

 

사실 이 땅의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고, 성전은 제사를 드리는 목적으로 세워진 건축물이다. 제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육체에 속한 인생(죄인)이 제사장의 인도로 그 모든 문제가 번제단에서 처리되어 지성소(至聖所: 지극히 거룩한 장소)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식이다.

번제단에서 희생의 피가 사면에 뿌려지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단 위에 불살라 여호와께 열납되도록 드리는 이 속죄제의 의미는 육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섭고 맹령한 심판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심판대를 통과한 자만이 지성소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 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25:22>

 

그러나 누가복음 10장 30절에 기록된 예루살렘은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의 마음을 붙들어 인도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히7:18>

 

‘여리고에 거하고자 하는 마음’……,

이 마음은 큰 세력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끌고 다닌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본다 <롬7:22,23>

 

“착하게 살아야지, 기도 해야지, 성경을 읽어야지……, 하며 예루살렘에 머물기를 원하지만, 어느새 여리고로 흘러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여리고에 머물면서 내 욕심만을 챙기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하고 자신을 채찍질 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노력을 하지만, 그 마음은 몸뚱아리가 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여전히 여리고에 끌려 내려가고 만다.

이런 인위적인 왕복운동이 바로 종교 활동이고 이 인간적인 종교 활동에 머물러 있는 자는 결코 예수를 만났다고 할 수 없다. ‘강도를 만난 자’가 예수의 그림자인 ‘사마리아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예루살렘에 거하라!’가 아니고 ‘여리고에 거하라!’도 아니다.

결국 여리고에 머물 수밖에 없는 우리를 설명해 주고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이 말씀도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 마음에 들려져야 한다. ‘하나님만을 섬겨라!’가 아니고 ‘재물을 섬기지 말라!’도 아니다. 그렇다고 ‘재물을 섬겨라!’도 아니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이 두 주인을 섬기는 마인드로 이 땅에 태어났다. 하나님도 섬기고, 나도 좀 섬기고…. 결국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산다.<딤후3:1~5>

이 마인드는 음란한 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 마인드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누가복은 10장에 기록된 강도 만난 자의 이야기는, 스스로 율법을 알고 있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생각에 젖어 있는 가련한 율법사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은 “너는 누구이고, 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가르쳐 주신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은 “네가 이웃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너는 이웃의 도움이 이 필요한 자이고 진정한 이웃은 사마리아 사람이다.”라는 답을 요구한다.

 

율법을 배우고 가르치고 솔선수범하는 율법사이지만, 율법의 진수(眞髓)를 알지 못하고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오르내리는 저주 가운데 있었다.

이 저주의 왕복 운동 중에 다행히(?) 강도를 만나 그 허물과 죄가 다 드러나 왕복 운동은 중단된다.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 드러난 곳, 그 곳에서 100% 하나님의 방법과 계획과 능력으로 자신을 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속할 수 있었다. <롬 9:26>

 

오늘 우리는 어느 길에 서 있는가?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인가?

강도를 만나 옷이 벗겨지고 거반 죽어 본 적이 있는가?

강도당한 자가 사마리아 사람의 섬김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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