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자
Digital graphics,
50.0cm x 39.0cm, 300 ppi,
2013.
1-5.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
야옹아 멍멍해봐
'야옹아, 멍멍해봐!'
이 익살맞은 문장은 한 애완동물 용품 상점 상호이다.
고양이가 '멍멍'하고 짖을 수 없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한 번 웃게 하기에 충분한 위트가 있다.
성경 속에 이와 비슷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야곱과 에서에 관한 말씀이다.
털사람, 그리고 사냥에 익숙한 맏아들 에서는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둘째 아들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과는 거리가 아주 먼 자식이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냥한 고기를 드리고 싶어도 형과 같지 못하고, 매끈매끈한 몸의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을 만한 조건이 하나도 없다.
좀 지나친 비유가 될 수 있지만, 멍멍이가 에서라면 야곱은 야옹이다. 사자같은 위용의 멍멍이 에서, 어머니 리브가의 치맛자락만 쫓아다니는 연약한 야옹이 야곱.
어느 날 아버지 이삭은 멍멍이를 축복하기로 정했다.
“멍멍아, 내가 늙어 눈도 어둡고 언제 죽을지 모르니 너는 들에 가서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라. 내가 먹고 죽기 전에 너를 축복하게 하라!"
어머니 리브가도 이 말을 들었다. 멍멍이 에서가 전통과 활을 들고 들로 나가고,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 말했다.
“야옹아, 멍멍해봐!"
야곱은 도저히 어머니 요구를 받아드릴 수 없었다.
“어머니, 야옹이가 어떻게 ‘멍멍’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사자같은 멍멍이 형은 나 보다 키도 크고 털도 있고 목소리도 다른데, 어떻게 아버지 앞에서 ‘나는 멍멍입니다. 축복해 주세요.’라고 할 수 있나요?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을 텐데…."
“야옹아, 너의 저주는 내게 돌리고 내 말만 좇아 해!"
야옹이 야곱은 어머니의 말을 따라 맏아들 에서의 옷을 입고, 매끈매끈한 몸을 염소 가죽으로 꾸미고 리브가가 만들어 준 별미를 들고 아버지 앞에 나아갔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른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야곱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이삭이 그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창27:18~24>
결국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표면에 나타난 사건의 내용을 기준으로 보면 명백한 거짓말이고 사기 행각이다. 범죄를 주도한 자는 리브가이고, 사기범 야곱,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 이삭, 그리고 에서는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내면에 흐르는 하나님의 기준, 말씀의 기준, 리브가의 기준으로 보면 거짓말이 아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2:28-29>
리브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그러니까 리브가의 사역 안에 이끌림을 받는 야곱의 모습을 통하여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
눈이 어두운 이삭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그림자인데, 우리는 이 ‘어두운 눈’의 세계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을 얻지 못하면 결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구원의 믿음이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순종한 아담은 하나님 앞에 죽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육신의 생각을 따라간 결과이다.
‘먹는 날’에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담에게 이미 심판이 내려졌고 죽었다. 영원하지 못한 모든 것은 죽은 것이다.
‘육(肉)’에 대한 심판은 끝났다. 우리 조상 아담만이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 대한 판결이다.
더 이상 받을 육에 대한 심판이 없다.
하나님 앞에 육신의 행위는 선악간에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판단 앞에 죽은 것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창6:3>
이 죽은 아담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은 그를 살리는 일이지<롬4:17, 요5:25> 죽이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죽은 자가 죽은 줄 모르고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지 못한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5>
멍멍이는 멍멍이고 야옹이는 야옹이다. 짐승의 세계 곧 ‘육’의 세계이다.
이 창세기 27장의 이야기는 육과 육을 구별하는 육에 대한 심판, 육에 대한 축복이 아니다.
이삭의 판정의 초점은 야곱의 목소리나 에서의 손에 있지 않고(육신에 대한 판정은 어둡고), '누구에게 속했는가?'에 맞추어져 있다.
“야옹아, 너의 저주는 내게 돌리고 내 말만 좇아 해!"
“야옹아, 멍멍해봐!"
야곱은 이 말을 받아드릴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거부하고 어머니의 계획과 믿음에 참여하였다.
야곱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리브가의 말을 하였다. 자기의 소리를 내지 않고 리브가의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진정한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얻을 수 있었다. 전능자의 판결이 그 믿음을 증명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12:3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