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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Digital graphics,

39.0cm x 50.0cm, 300 ppi,

2013.

2-4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들

 

 

자의적 숭배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99세가 된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사람으로는 가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언약을 선포하신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나는 전능하다.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2.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고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된다.

3. 네 이름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비)라 하라. 네게로 좇아 나라와 열왕이 나온다.

4. 내 언약을 너와 너의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며, 너와 네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한다.

5.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다. 받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

6. 아내의 이름을 사라(열국의 어미)라 하라. 명년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고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7. 이스마엘도 크게 번성하지만, 내 언약은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운다.

 

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은 '웃음'이었다.

이 웃음은 "너는 열국의 아비다!"에서는 반응하지 않았다. "네 아내는 열국의 어미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나타난 반응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구체화 되면서 아브람은 그만 웃고 말았다. 이 웃음은 하나님의 언약에 감동된 기쁨과 감사의 웃음이 아니다. 실소(失笑)다.

 

"아니, 어떻게 구십 세가 된 할망구가 자식을 낳을 수 있단 말인가? 살다 보니……,  허허……."

 

이런 수준의 웃음이다. 이 웃음은 하나님을 향한 아브람의 믿음의 수준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나는 전능하다!"라고 아브람에게 말씀하시지만, 아브람의 마음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인간적인 기준은 하나님의 전능함을 공격하고 있다.

아브람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을 일으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끄시는 사역의 시작에서 이 충돌의 원인을 찾아 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12:1,2>

 

하나님은 이미 축복의 언약을 선포하셨다. 심지어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창12:3>는 어마어마한 결정을 내리셨다. 전능자 하나님만이 누릴 수 있는 세계를 한 인생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만을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복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다.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명령이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은 아브람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육'의 세계이고, 하나님을 거절한 아담의 세계이다.

이 영역이 지극히 저주스러운 것은, 이곳에서 '하나님'도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물론 가짜 하나님이다. 이 가짜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이고 스스로 선택하고<요6:15> 다듬어 만들어 가는 '각도로 새긴 우상<출32:4>'과 같은 신이다. 아브람도 이 영역에 속하여 있을 때 스스로 만든 상속자가 있었는데, 바로 '엘리에셀<창15:2>'과 '이스마엘<창17:18>'이다.

 

창세기 17장에서 나타난 아브람의 웃음은 '본토, 친척, 아비 집'에 머물러 있는 아브람의 모습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그 영역에서 떠나게 하는 적극적인 사역을 하시는데, 바로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이다.

 

아브라함에게 명한 할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 언약은 하나님이 지킨다는 ‘언약의 표’이다.

둘째는,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이었다는 ‘증거의 표’이다.

만일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전능함을 무시하는 육신의 기준과 그 세력이 없는 자라면 할례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할례는 육체를 가진 모든 인생에게 주어진, 그리고 반드시 잘라내야 할 육신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출13:13>

 

나귀가 하나님 앞에 목이 꺾어져야 하는 신분으로 태어난 것처럼 육의 세계가 처리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일은 "자신의 기준을 잘라내는" 과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10:16>

 

하나님 앞에 목을 곧게 하지 못하는 마음이 할례 된 마음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실소(失笑)'로 반응했지만, 그 마음을 잘라내고 하나님의 전능함과 완전함에 참여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만들어 나아갔다. 자신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아브라함은 결국 '범사에 복을 누리는<창24:1>' 믿음의 삶의 본이 되었다.

 

할례는 결코 훈장이나 계급이 아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한 흔적이다. 그 패역의 세력을 거세한 표시다.

사도 바울은 마음에 이 흔적을 가진 자,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삶을 사는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2:11>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빌 3:3>

 

그러나 만일 할례 받지 못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것은 자의적 숭배<골2:23>이고 인위적인 종교 활동이다. 이 활동은 인간적인 기준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세계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시각에 지극히 합리적이고 적법한 형태로 나타난다. 지극히 무서운 마귀적 활동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사교(邪敎)에 속한 거짓 선지자도 있지만 이 세상에 적응된 합리적이고 적법한 형태의 인간적인 선지자는 더욱 많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앙은 인간적인 수준의 선택을 용납하지 않는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7:13>는 예수의 외침 속에 준비된 하나님의 문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문이다.

자기의 근본을 발견하면 자기를 거부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거기에 이미 준비 된 유일한 문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평생 의지하고 기대하면 살았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이 혼돈이고 공허이고 흑암이 전부인 '사망의 영역'이라는 사실이 믿어진 마음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는 예수의 음성이 들려진다. 바로 할례 된 마음에 임하는 생명의 역사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 일하실 때, 예수의 인도함을 따라 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할례 된 마음들이다.

그러나 할례가 육체의 모양을 내는 장식이 된 자들에게 배척을 당하셨고, 예수를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는<요6:15> 자의적 숭배자들을 피하여 외로운 길을 가셨다.

오늘도 이 땅에 정통 그리스도 교회를 자랑하고 순수 복음주의를 외치는 이들이 충만하다.

그리고 오늘도 예수는 이 땅에서 외로운 길을 가신다. 할례 된 마음을 찾아서…….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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