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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of Goya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을 뜬다),

Dry point on acrylic board, 600x900mm, 2014.

2-5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들

 

 

죄의 정욕

 

 

중국 길림성 연변에서 한 자매님과 교제를 하는데, 나는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같은 동포인데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더욱 답답하였다. 연변 사투리가 심하여 말하는 내용의 반 정도만 귀에 들어왔다.

옆에 있는 형제에게 도움을 구했다.

 

“형제, 지금 자매님이 반복적으로 말하는 ‘노시리’가 무슨 뜻이에요?”

 

‘노실(老实)히 말해서’는 ‘솔직히 말해서’라는 뜻이고, 노실(老实)은 중국어인데 조선어식으로 사용된 말이라고 형제는 가르쳐 주었다.

그 자매님은 ‘솔직히 말해서’가 입버릇이 되어 있었다.

교제를 마칠 즈음에, 언어로 인한 답답함은 해결이 되었지만, 또 다른 답답함이 나에게 임하였다.

 

“우리는 과연 솔직할 수 있는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17:9>

 

성경적인 근거로는, 우리 인생은 자신의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조차도 헤아릴 수 없는 존재이다.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솔직히 말할 수 있는가?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시19:12,13>

 

다윗은 자신이 얼마만큼 잘못된 자인지조차 몰라서, 그 헤아릴 수도 없는 허물을 하나님께 부탁하고, 잘못인 줄 알면서도 범하는 죄를 짓지 말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

우리 인생이 인지할 수 있는 죄의 세계는 심연(深淵)의 한 부분이다. 다윗은 이 심연을 ‘기가 막힐 웅덩이’<시40:2>로 표현한다. 다 알 수도 없고 다 설명할 수 도 없는 무저갱의 세계이다.

그래서 시편 19편 속에서 다윗은 알게, 모르게 범죄할 수밖에 없는 ‘육’의 세계에 대한 분별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아담의 형상’<창5:3>은 ‘육에 속한 형상’을 의미한다.

‘육에 속한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창5:2>과 대비되는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구체적인 현현(顯現)은 ‘남자와 여자’, 곧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이다.<엡1:3>

‘육에 속한 세계’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위한 ‘잠시 세계’이다. 이 세계는 이미 하나님의 판정이 끝난,<창3:17-19> 버려진 세계이다.

 

저희는 육체 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시78:39>

 

이 ‘육에 속한 세계’와 ‘영에 속한 세계’에 대한 분별의 지혜를 얻으면, 그 지혜와 거기에서 형성된 믿음이 하나님의 세계에 속하게 하고 에녹과 노아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분별하지 못할 때, 육의 세력 가운데 머물 수밖에 없고, 영적 세력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게 된다. 곧 마귀의 역사이다.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 속에서 이 마귀의 구체적인 역사를 분별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롬7:5>

 

이 5절의 내용은 24절까지 이어진 말씀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바울은 ‘육신에 있을 때’, 자신의 육신의 생각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을 때, 육체에서 형성되는 지혜와 성실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나타내 보이려는 열심을 따라 가보았는데, 그 결국은 곤고와 사망뿐인 것을 간증하고 있다.

바울의 분별로는 그 육신의 원함과 열심이 ‘죄의 정욕’이다.

죄에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바울과 같은 분별이 있어서 육신에 계속 머물지 아니하고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산다.

그러나 마귀의 역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육과 영에 대한 지식을 혼잡케하고 하나님의 분별에 함께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육신에 머물게 한다.

 

‘죄의 정욕’이 영어 성경에서는 ‘the motions of sins’로 번역되어 있다. ‘motion’에는 ‘배변(排便)’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데. ‘have a motion’은 ‘변통(便痛)이 있다’, 쉽게 표현하면 ‘뭐가 나오려고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 육신의 열심을 내는 모습은 ‘죄를 지으려는 몸짓, 가증한 짓거리’가 아닐 수 없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마8:19>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26:33>

 

이 두 사람의 열심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불가능’이다. 이유는 우리가 이미 살펴 본 바다.

온전한 신앙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얻어 누리는 세계이다. 다른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과 권세 아래 복종되어 있다. 그 피조물 중 잠시 하나님을 거스리는 존재와 세력을 허락하였는데, 육신의 생각을 통하여 나타나는 사단의 세력이다. 자기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신뢰하는 ‘육신에 속한 자’는 사단의 세력을 나타내는 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하게 하시느니라 <욥34:23,24>

 

하나님이 원하는 ‘다른 사람’은 당연히 ‘세력이 없는 자’이다.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없게 된 자,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만이 소망이 된 자이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요6:70>

 

예수가 제자를 택한다. 세상의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여 하나님의 세력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 <고전1:27,28>

그러나 자기 스스로 예수를 택한 자가 있다면, 그는 마귀에 속한 삶을 사는 자이다. 그는 자기 의지로 예수를 택할 수 있는 자이고, 자기 의지로 예수를 버릴 수도 있는 자이고, 자기 의지로 자신을 심판하기도 하는 ‘육에 속한 자’이다.

 

‘육에 속한 열심’은 ‘죄의 정욕’이다.

그러나 육과 영에 대한 하나님의 분별을 얻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열심을 결코 죄의 정욕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생들을 향하여 ‘열심’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원하신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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