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산 위에 기호를 세우고
Digital graphics,
50.0cm x 27.8cm, 300 ppi,
2013.
4-4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이야기
벌이 칠십 칠 배
1978년도에 상영된 잭 골드(Jack Gold) 감독의 ‘메두사(The Medusa Touch)’라는 영화가 있다. 오래 전에 본 영화라서 내용의 여러 부분이 기억에서 많이 지워졌지만, 영화의 중심 줄거리는 뚜렷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한 사람의 마음에 형성된 분노가 그 분노케 하는 대상을 다스린다. 그에게 임한 초능력이, 분노케 하는 대상에 대한 생각 속의 판정을 그대로 현실에 재현한다. 세상은 그의 심판 앞에 있다.
본래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인데, 왜 영화의 제목으로 삼았는지 잘 모르겠으나, 메두사의 머리카락이 뱀으로 되어있는 것과 사람의 생각과 그 초능력이 이 세상에 재앙으로 임하는 부분은 연관이 있어 보였다.
영화 속의 주인공 모랄은 엄청난 초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자신에게 초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버지와 새엄마의 죽음이었다.
친엄마를 일찍 잃은 어린 모랄은 새엄마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는다. 어느 날, 가족이 함께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었고, 어느 멋진 해변 관광지에 도착한다. 새엄마와 아빠는 전망 좋은 해변 절벽 위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멀리까지 펼쳐진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는데, 모랄은 풍경에는 관심이 없고 조금 떨어진 곳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아빠와 새엄마를 그리고 뒤에 세워 놓은 자동차를 바라본다.
돌연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새엄마와 아빠를 향해 돌진한다. 결국 두 사람과 자동차는 높은 절벽에서 바다로 추락하게 된다. 모랄의 상상 속의 요구가 현실이 되었다.
모랄은 자신에게 초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을 자기가 통제할 수 없다.
모랄의 마음에 형성된 노여운 마음이 그의 상상 속에서 공격적인 시나리오를 만들고, 그 시나리오가 현실에서 물리적인 재앙으로 실현된다. 그의 파괴적인 시나리오는 고층 아파트에 사는 옆집 아줌마를 창문 밖으로 뛰어 내리게 하고, 여객기를 추락하게 하고, 우주 왕복선을 폭파하게 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그의 심리 치료 의사가 모랄을 살해한다. 그러나 심장은 멎었지만, 그의 뇌는 활동을 계속한다.
영국 여왕이 참석하는 큰 행사장인 성당 건물이 무너지고, 그 다음 모날의 시나리오는 원자력 발전소로 정해지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이 영화는 사람의 분노에 초능력이 부여된다면, 이런 엄청난 재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대단히 의미 있는 인간에 대한 해석이다.
“만일 우리 모두에게도 모랄과 같은 초능력이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순식간에 지구는 초토화되어 사라져 버릴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재앙의 근거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있는데, 이 세계는 제어될 수 없는 세계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악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더글라스 러미스(Douglas Lummis)의 저서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 실린 통계에 의하면, 100년간 이 세상에 일어난 전쟁, 즉 교전권을 가진 국가에 의하여 살해된 사람은 2억 331만 9000명이다.
이는 합법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죽인 숫자이다.
1년에 약 200만 명 씩 살해 된 이 수치는 매년 교통사고로 숨진 120만 명(2004년 4월 7일 WHO 발표)보다 많다.
초능력이 나타나지 않아도 재앙은 이미 있고, 진행 중이다.
하나님은 인생의 마음에 있는, 통제될 수 없는 폭력적인 시나리오를 지적해 주신다.
하나님의 율법을 근거로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자이고, 미움이 살인죄에 적용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간음과 살인을 저지르고 사는 인생들인가?
그렇다면 인생 그 자체가 재앙이 아닌가?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욥5:6,7>
성경 속에서 이 재앙의 근원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보호 영역을 떠나는 가인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창4:16>
하나님이 가인에게 준 ‘표’가 가인에게 만족이 되지 못했다.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 놋 땅에 이르러 거기에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 하였다. 자기가 자신을 보호하는 삶의 길을 간다.
육축을 치고, 수금과 퉁소를 잡고, 동 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삶을 산다. 자신이 자신을 섬기고, 즐겁게 하고, 스스로 지키는 삶이다.
-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죽이고 죽고, 죽고 죽이는 삶…….
하나님의 ‘표’를 거절한 가인의 후손 라멕은 결국 자신을 위하여 남을 죽여야만 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재앙의 근원지는 하나님의 보호구역을 무시하는 인생의 마음이다.
극중 재앙 가운데, 실제 세상에 임한 재앙에서 가장 많이 외치고 듣는 소리가 있다.
“오 마이 갓!”
Oh, My God!이든 Oh, My god!이든, 알고 부르든, 모르고 외치든 해답은 하나님에게 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24>
하나님은 가인에게 내가 너를 반드시 지켜주겠다는 의미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는다.”는 경고와 함께 ‘표’를 주셨다. 이 ‘표’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의 세계이다.
가인의 성실과 열심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세계를 무시하기에 충분했고,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이는 결과를 낳았다.
하나님은 가인의 패역이 드러난 곳에서 가인을 살리고 보호하는 유일한 영역을 제시해 주셨다.
가인은 이 하나님의 ‘표’를 무시하고 자기의 길을 갔다. 결국 라멕에 이르러 다시 패역이 드러났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욘2:8> 자기의 성실과 열심과 판단을 신뢰하는 삶의 결과는 파괴적인 사망이 전부였다.
라멕의 패역이 드러난 그 곳에서 라멕은 우리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한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마치 하나님을 조롱하는 말로 들릴 수 있다.
만일 가인에게 준 하나님의 ‘표’를 무시하는 라멕이라면 이 말은 분명히 하나님을 향해 빈정거리고 조롱하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결과가 파괴적인 사망으로 드러나고,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 감각 되어서, 조상 가인에게 하나님이 주신 ‘표’의 세계가 깨달아 지고 그 세력이 그 마음에 임하게 되었다면, 라멕의 입에서 터져 나올 찬송이 바로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라는 찬송이다.
내가 가인에게 약속하였던 것과 같이 내가 너를 ‘반드시’ + ‘반드시 열 번’ 보호하고 섬겨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5:20>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있었든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지면 허락되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너희는 자산 위에 기호를 세우고 소리를 높여 그들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그들로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 <사13:2>
자산(赭山)은 나무가 없어 바닥이 발갛게 드러난 산을 지칭한다. ‘육의 근본’이 드러난 곳,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 적나라(赤裸裸)하게 드러난 곳에 기호(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진다.
이러한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진 마음을 하나님은 존귀하게 여기신다.
그리고 인생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살 수 있는 유일한 영역, 이 7배 77배의 보호구역은 살리는 영역, 누리는 영역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5,6>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5:14,15>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예수”<요1:29>는 십자가에 오르셨다.
나무에 달리셔서 아담으로 말미암은, 죄에 감염되어 있는 아담 안의 우리 모든 인생의 죄에 대한 심판을 대신 받으셨다. 더 받아야 할 심판이 없다.
참된 신앙은 죄를 처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심판과 부활에 참여하는 일이다.
아직 처리되지 못한 죄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이다. <히10:29> 지극히 저주스러운 마귀적인 행태이다. 이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받을 형벌이 칠십 칠 배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