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
Digital graphics,
40.0cm x 25.0cm, 300 ppi,
2013.
3-6 하나님을 만나는 이야기
익은 마음
중국 사람들은 교자(餃子)를 즐겨 먹는다.
교자를 삶을 때, 끓는 물에 교자를 넣고 물이 다시 끓어 교자가 떠오르면 냉수 한 바가지를 붓는다. 이 작업을 두세 번 정도 반복한다. 이유는 교자 속의 생고기를 충분히 익히기 위해 교자피가 물러 터지지 않게 하는 조치이다.
교자의 속이 잘 익어야 제맛이 나는 것처럼, 인생 가운데에도 ‘익은 맛’을 내는 마음이 있다.
눈물에 젖은 빵, 가시밭 길 인생, 사랑과 이별 등 다양한 인생의 희로애락이 경험된 마음이 익은 맛을 낸다면, 한 쪽으로 치우쳐 있는 얕은 감정적 체험은 덜 익은 맛을 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의 세계 속에서도 하나님이 즐겨 받을 만한 ‘익은 맛’이 있고, 하나님이 받을 수 없는 ‘덜 익은 맛’의 마음이 있다.
이 하나님이 받을 만한 ‘익은 맛’은 ‘하나님의 심판에 복종 된 마음’, ‘회개 된 마음’, ‘희어진 마음’<레13:13, 단11:35> 등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약, 복음서 속에 예수님이 만난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예수의 인도함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할 수 있게 된, 은혜를 입는 자들의 마음을 통해 이 ‘익은 맛’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다.
귀신이 들려 흉악해진 딸의 어미가 예수님을 찾아 왔다.<마15:21-28>
예수님은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가나안 여인의 간청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
예수의 이 말씀을 요즘 세상의 기준 위에 놓고 보면 지독한 인격 모독이고 인종 차별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가톨릭 교황이 이렇게 한 여인을 개 취급하였다면……,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 예수님 말씀은 이미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규례이다.<레22:13, 겔44:7>
문제는 듣는 여인의 반응인데, 이스라엘 백성도 아닌 이방 여인에게서 기적과 같이 놀라운 답변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에게는 예수의 말씀을 받아드리기에 충분한 ‘익은 마음’이 준비되어 있었다.
‘개’라는 판정에 동의할 수 있는 심령, 부스러기를 구하는 마음, 은혜입기에 합당한 마음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결국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요구를 들어 주시는 예수와 그의 보증을 얻어낸다.
그러면, 이 귀신이 들려 흉악해진 딸을 통하여 그 어미가 경험한 세계는 어떠한 것인가? 그리고 여인의 마음에 형성된 ‘큰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 세계를 살펴 헤아리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연약한 인생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마음에 체험되는 세계는 사람마다 그렇게 다르지 않다.
큰 흉년은 덮여 있고 감추어져 있는 인생의 흉(凶) 한 세계를 드러낸다. 인생들이 물질적인 풍요로움 가운데 ‘도덕, 윤리, 종교’ 등으로 포장되는 것이지, 그 풍요로움을 걷어내면 그 중심에 숨겨져 있는 흉한 세력들이 노출된다.
가나안 여인의 딸이 처음 귀신에 들려 고통할 때, 여인은 딸이 애처롭고 가엾어서 눈물로 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딸을 위하여 어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면서 모든 수고와 시간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딸의 증세가 더욱 흉악해지면서,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당하면서 어미의 마음에 가시덩굴과 같이 자라나는 사념(邪念)에 고통하기 시작한다.
결국 딸의 드러난 흉악한 세계가 자신의 마음 중심에도 도사리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형편에 머물러 있던 어려움과 고통은, 근본으로 인한 고통과 절망의 나락으로 옮겨졌다.
사망의 깊은 늪과 같은 세계를 헤맬 때, 여인에게 들려진 예수이 관한 이야기는 칠흑 같은 어두움에 ‘빛’이었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임이 분명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피조물의 위치를 회복하고, 탄식과 눈물로 하나님의 긍휼 앞에 서는 일, 이는 하나님이 받을 수 있는 제사, 곧 ‘상한 심령’이다.<시51:17>
“환영광림(歡迎光臨)”
중국에서 가장 흔히 보고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이다.
손님을 환영하는 문구로 손님을 ‘빛(光)으로 표기하였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식당 문에 써 붙인 ‘환영광림’의 용도는 “환영전림(歡迎錢臨)”이겠지만, 손님을 ‘빛’으로 여긴 중국인의 지혜는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손님을 빛으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가 ‘어두움’으로 여겨진 마음이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사야 9:2>
하나님은 ‘빛’ 되신 예수만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 빛을 영접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드는 일도 하신다.
귀신 들린 딸을 가진 모든 부모들이 예수를 찾고, 구하고,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여인의 마음을 만드셨다.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빛’이 ‘빛’으로 보이는 마음으로…….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포위되어 크게 굶주려 있었다.<왕하7:> 성 안의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심하게 굶주려 있었는데, 심지어 어미가 자식을 삶아 먹는 처참한 일도 벌어졌다.
그러나 아직 의지할 만한 몇 가지가 있었다. 나귀 머리, 합분태(비둘기 똥) 그리고 성(城)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 때,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주 특별한 결정을 하게 된다.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지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지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 <왕하7:4>
깊고 깊은 사망의 어두운 세력 안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는데, 그것은 아람 진에 있는 양식이었다.
문둥이들이나 성 안의 사람들이나 아무도 그것을 ‘양식’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그러나 네 명의 문둥이에게 그것이 ‘양식’으로 보였다.
더 이상 망할 것도 없고, 이 이상 방법도 없고, 더 이상 기대할만한 것이 없는 그 곳에서 ‘생명의 시각’을 얻어 그들은 긍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양식을 먹고 마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