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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Digital graphics,

66.0cm x 44.4cm, 300 ppi,

2013.

4-2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이야기

 

 

본적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시3:1>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하여 맨발로 머리를 가리고 감람산 길로 올라가는 다윗이 일성(一聲) 탄식이다.

지금 다윗을 죽이려는 자는 블레셋도 아니고 암몬도 아니고 사울에 속한 자도 아니고 자기 몸에서 나온 아들이다.

 

아들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훔쳐 아버지의 모사 아히도벨과 함께 반역을 일으킨다.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이다.<삼하 11:3, 23:34> 다윗은 유부녀인 밧세바를 불러 간음을 행하였다. 이 범죄는 다윗이 왕위에 앉은 이후 겪어야 할 환난의 기점이 된다.

 

아히도벨의 모략을 따라 압살롬은 아버지의 후궁들, 자신의 서모들을 지붕에 올려 백성들의 눈앞에서 동침하는, 상상하기도 힘든 하극상을 연출해 내었다. 아비의 마음과 자식의 마음을 완벽하게 갈라내려는 아히도벨의 모략이다. <삼하16:21>

 

처참한 피난길에 찾아 온 시므이는 다윗을 향하여 저주의 한마디를 더 보탠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鄙陋)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삼하16:7>

 

이에 다윗과 함께하는 아비새가 그의 머리를 베려 하지만, 다윗의 반응은 하나님 앞에 서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삼하16:10,11>

 

압살롬의 반역은 ‘왕위(王位)’ 라는 ‘꺼풀 광채’로 덮여 있던 다윗의 적신을 또다시 드러내 주었다.

시므이를 통해 듣는 ‘비루한 자’, 행동이나 성질이 너절하고 더러운 자라는 형용은 다윗의 근본을 드러내는 데는 조금 미흡하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왕권으로 밧세바를 취하는 간음을 저지르고, 이 범죄를 덮으려고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교활한 방법으로 살해하였다. 죄에 죄를 더하는 자의 모습이다. 비루하다는 표현보다는 ‘극악무도(極惡無道)’라는 말이 적절하게 들린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시3:1,2>

 

처참한 지경에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터트린 탄식의 내용은 ‘대적 자’이다. 그리고 이 대적 자들은 다윗으로 하여금 ‘이제는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 메시지는 다윗에게 치명적인 판정이다.

압살롬도, 아히도벨도, 시므이도, 그리고 압살롬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다윗을 향하여 외친다.

 

“다윗, 너는 이제 끝이야!”

 

참담케 하는 결정적인 존재가 또 하나 있었는데, 그는 바로 자신이었다.

다윗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래, 맞다. 이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려는가 보다…….”

 

자책하는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와 다윗을 깊은 정죄의 구덩이에 빠트려 버렸다. 두렵고 절망적인 어두움 속에서 다윗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근본을 확인한다.

그러니까 결정적인 대적 자는 압살롬도 아니고, 아히도벨도 아니고, 하나님의 결정보다 사람의 결정에 치우친 마음을 가진 다윗 자신이다.

 

그러나 참 놀랍고 소망스런 세계가 다윗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근본을 확인한 그 곳에서 자신의 근본을 알게 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거기에는 다윗을 정죄에 머물 수 없게 하는, 절망과 어두움을 다스리고 이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약속이 준비되어 있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119:25>

 

하나님은 다윗을 버릴 수 없다.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허락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삼하7:8-16> 그 약속 안에는 다윗이 사울처럼 버려질 수 없다는 조항이 있다. 다만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한다는 조항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다윗을 다스리고 회개케 하신다. 회개된 다윗의 마음이 시편 51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51:5>

 

이 다윗의 회개는 ‘피 흘린 자’, ‘비루한 자’, ‘패역무도(悖逆無道)한 자’로 여김을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상은 그 이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속하여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근본적인 허물에 대한 확증과 각성(覺醒), 그리고 온전한 회개를 이루는<고후7;10> 삶이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본적은 우묵한 구덩이<사51:1>로 기록이 되어 있고, 한나의 본적은 진토와 거름더미<삼상2:8>이고, 다윗의 본적은 흙더미<사11:1> 이다.(이세의 뿌리(本)가 한어성경(中文和合本)에서 ‘    ’(흙더미:墩)으로 표기되어 있다)

하나님에 속한 사람들의 영적 본적은 같다.

이 본적은 하나님이 알려주신 곳<창3:19>이고, 하나님이 기억하고 있는 주소이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103:14>

 

자신의 본적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수 없다. 옷을 입을 때, 첫 번째 단추를 잘못 꿰는 일과 같다.

이 영적 본적에 이르는 온전한 회개는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하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제 시편 3편 3절 이하의 다윗은 대적의 세력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노래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시3:3-8>

 

하나님은 다윗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의 머리를 어두움에서 들어 다윗과 함께하는 하나님을 확인케 하시고, 대적 자의 세력을 꺾어주셨다.

다윗이 우리에게 보여 준 ‘승리하는 삶’의 모습이다.

 

대적이 없으면 승리도 없다.

깊은 어두움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

우리 인생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전능함을 위하여,

우리의 더러움은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거룩함을 위하여,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패역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존재한다.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 할지어다 <사12:5>

 

극히 아름다운일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을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곧 우리의 구원이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세계는 없다.

그러나 이 극히 아름다운 세계는 극히 더럽고 악한 세계가 경험된 마음에 주어지는 세계이다. 그러니까 극히 추하고 패역한 자신의 근본에 대한 감각 없이 극히 아름다운 세계를 누릴 수 없다.

자기 근본에 대한 감각, 영적 본적에 대한 각성과 회복이 참된 신앙의 출발점이다.

 

하나님이 다윗의 근본을 모르고 다윗을 택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근본을 알게 해주고 그 복종된 마음을 가진 다윗을 향하여 ‘내 마음에 합한 사람’<행13:22>이라고 보증하셨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된 사람은 어떤 누구도 자기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다. 다윗은 압살롬의 패역을 통해 자신을 본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3:4>는 하나님의 판단이 자신의 판단이 된 사람은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판단 앞에 다시 나아가고 묻는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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