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큰 가증한 일/ 겔8:13-16 20220629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무지(無知)보다도 무지를 무지가 아닌 것으로 왜곡하려는 시도는 더욱 가증한 일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막13:14)
서지 못할 곳(거룩한 곳)에 가증한 것이 섰다는 뜻은 가증한 것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려는 시도가 아니겠는가?
'담무스'는 이방 신의 이름이다.
이 가증한 우상의 이름이 이스라엘 월력 중 4월의 이름이 되었다.
더욱 가증한 일은 여호와의 전 안뜰에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동방 태양을 경배하는 이십 오인의 행태이다.
이는 계시록에 기록된 하나님께 경배하는 이십 사 장로의 상징적 내용(계4:4,10, 5:8, 11:16, 19:4)과 대치(代置)된다.
'우상(偶像)'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쎄멜'은 '닮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가증한 세력의 진원은 하나님을 닮아 보이려는 사단의 활동이 아닌가? (겔28:2,고후11:14)
그리고 사단은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진실을 왜곡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고, 결국 인생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선하고 옳은 것이 있는 줄 착각하게 한다.
자산 위에 기호를 세우고/ 사13:1-3 20220626
가인의 죄악이 드러난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켜주시겠다는 '표'를 주셨다.
호세아서에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너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성취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호1:1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인생의 하나님을 향한 패역이 드러난 곳이고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유하심과 사랑을 밝히신 곳이다.
모든 인생을 향하여 가장 존귀한 사랑을 나타낸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그 아버지께서 존귀히 여기시고 거룩히 구별된 백성으로 삼으신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시16:3)
자산(赭山/ the high mountain/ 净光的山/ 샤파하르; 벗겨진 산) 위에 기호(旗號)가 세워지는 일은, 자신의 근본이 적신(赤身)으로 드러난 자를 구별하여 존귀케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세리장이고 부자'인 삭개오가 나무에 달려 있는 모습에서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저주와 드러난 적신의 형상을 본다.
그리고 이 저주를 대신 받으려고 십자가에 적신으로 올라가실 예수 그리스도 눈에 들어 온 삭개오는, 찾고 찾던 죄인이고 그의 집(마음)에 들어가 유할 만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다.
천국이 저희 것/ 마5:10 20220622
자신이 벗은 줄 알게 된 아담에게 자신을 가리려는 수고가 기다리고 있다.
벗은 줄 모르는 자에게는 가리려는 마음에 형성되지 않는다.
성경은 모든 인생이 천국(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소경이고 귀머거리이고 반응하지 않는 절망적인 존재(사43:8)임을 설명하여 주고 있다.
특히 마태복음 5장의 예수께서는 모든 인생을 가리고 꾸미고 있는 위선(僞善)을 적발(摘發)하여 밝히는 율법의 진수(眞髓)를 듣게 하신다.
이 말씀 속에서 알게 된 나의 모습은 지옥행 DNA를 가지고 태어난 절망적인 존재이다.
다 헤아릴 수 없는 저주의 심연(深淵)에서 헤매던 자가 비로소 자신의 정체가 하나님 앞에 적신(赤身)으로 드러난 곳에서 그 말씀하시는 이의 권세에 이끌림을 받는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의나 노력으로는 결코 천국에 이를 수 없는 부족함을 고(告)하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칠 수 있었다.
이 부족함은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하여 놓은신 온전한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1)
이 완전한 하나님의 의를 얻은 자는 이 의를 얻지 못한 자들에게 핍박을 받는다. 이 핍박을 받는 일이 천국을 누리는 일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 마5: 20220619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판정에 다스려진 아담은 '생명'을 구하는 반응을 나타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담을 위하여 '가죽옷'을 입혀 주셨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판정에 다스려진 마음이 그 다음 준비된 하나님의 세계에도 이끌림을 받는다.
산에 올라 앉으신 예수의 말씀 속 '복이 있는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복이 있고 없고의 근거가 마음의 세계에 있는 것이지 물질의 현상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시1:1)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 땅의 인생 중에서는 찾을 수 없다. (요일2:16, 전9:3, 시14:2-3)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은 이 땅에 머리둘 곳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예수께 이끌리는 자들의 마음에 만들어 지는 하나님을 향한 회개이다.
예수께서는 이를 위해 산에 올라 입을 여셨다.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 전5:15-18 20220615
전도서 5장 말씀 속에서;
'낙을 누리는 삶'의 대비된 고통은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이다.
'낙을 누리는 삶'(kjv 좋은 열매를 즐기는 것, 원어직역; 좋은 것을 보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공간에서 가장 좋은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즐거워 하는 삶이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은과 풍부가 자신을 즐겁게 하는 최선으로 여긴다면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에 매몰되어 번뇌와 분노가 일상이 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아담으로 시작하여 이 구덩이에 빠진 모든 인생이 스스로 이 폐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은 없다.
지혜와 능력은 하나님께 속하여 있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아담에게 필요한 것은 은과 풍요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2 )
이 바울의 간증은 지혜와 능력을 얻은 자가 '낙을 누리는' 선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이 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에 머물러 휘둘리고 있는 자가 된다.
백부장과 믿음/ 마8:5-13 20220612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던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으로 눕게 되었고 백부장은 이 문제를 들고 예수께 나왔다.
백부장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 주시는 예수께 또 하나의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백부장에게 있었다.
"주께서 내 지붕 아래로 오심을 내가 감당할 자격이 없사온즉 오직 말씀만 하옵소서." (마8:8 kjv)
이 말에 담긴 백부장의 마음에서 예수는 큰 믿음을 보셨다.
그리고 그 믿음이 하인을 낫게 하였다.
명령과 복종의 세계에 익숙한 백부장에게 하인의 중풍병은 그 명령과 복종의 영역을 벗어나게 하였다.
이 다른 영역에 대하여 백부장은 무익하고 접근하기 어렵고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을 보게 되었고, 기이하게도 이 영역에 계신 예수에 대한 신뢰가 마음에 형성되었다.
백부장의 믿음은 이 두 영역이 뚜렷이 분별되면서 형성된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질을 같이 한다.
믿음은 말씀 안에서 발견된 무능한 자신과 전능자에 대한 감각이고 반응이다. (눅17:7-10)
족하다/ 눅22:35-38 2022060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전대와 주머니와 그리고 검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제자들이 준비한 검 둘을 예수께 보였을 때, '족하다'라고 말하셨다.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말씀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 종교인들에게 거짓 선자자요 실패한 선지자로 여김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버림 받는 일을 족하게 여기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불법자로 여기고 죽이려는 자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오르셨기 때문이다. (사53:11-12)
예수께서는 '말씀대로' 되는 것에 대하여 '말씀대로' 만족히 여기셨다.
오늘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빌2:5)으로 사는 사람이 누리는 만족은 어떤 것인가?
예수처럼 세상 종교인들의 시각으로 불법자요 실패한 자들로 여김을 받는 일을 족하게 여기는 삶이 아닌가?
그리고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으로 섬기는 수고에 만족하는 삶이 아닌가?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사53:12 20220605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하여 그는 찔리고 상하였다.
우리에게 임하여야 할 징계와 채찍을 대신 받은 그로 인하여 우리는 치유와 평화의 세계를 누린다.
죄악에 물든 인생은 다 양과 같이 제 길 가기에 바쁜 삶을 살지만 여호와께서는 무리의 죄악을 처리해 주셔야 하였다.
그렇지만 자신의 허물과 죄악에 대한 감각과 분별이 없는 인생이(시19:12, 렘17:9, 사6:9) 어떻게 구원의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을 수 있는가?
어둡고 미련한 인생은 허물을 담당하려고 오신 이를 범죄자 중의 하나로 취급하였지만, 하나님의 의로운 종은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그들의 죄악을 위한 속건제물이 되셨다.
이 기묘하고 경이로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 중에,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자들을 위한 그 분의 기도가 있다.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사53:12)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눅23:34)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사람들에 비하여 우월한 백성이 아니다 그 분의 기도로 은혜를 입은 백성이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 빌3:17-21 20220601
바울의 사역 속에 눈물을 흘리며 형제들에게 권고해야만 하였던 어렵고 고통스런 문제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들의행태이었다.
이 원수들의 문제는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야기되는 문제이고, 은혜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흘러가는(갈3:3) 세력에 관한 것이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경험되는 어렵고 고통스런 문제이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지만 좀비처럼 살아 난 자들이다.
원수들은 자신의 육체를 신뢰함으로 원수(롬5:10, 롬8:7)를 원수로 여기지 못하고 십자가 원수의 길을 간다.
결국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 속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자신에 속한 그리스도의 삶을 살려고 한다.
그리고 원수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므로 자신이 아는 복음으로 복음을 대적한다.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는 권고로 이 문제에 대한 대안(對案)을 제시하였다.
빌립보 3장의 바울 자신의 간증 속에 보인 하늘의 시민권(kjv생활 방식)을 가진 자의 삶, 구원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을 사는 자들을 주목하라는 권고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터가 무너지면/ 시11편 20220529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하여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았다. (삼상21:)
그 곳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거룩한 떡을 먹을 수 있었으나 골리앗의 칼을 보면서 그것이 자신을 지켜주는 데 유익한 것으로 여겼다.
다윗은 떨칠 수 없는 두려움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을 간다.
그러나 그 곳 상황이 다윗이 원치 않는 국면으로 흐르자 돌연 대문짝에 그적거리고 침을 수염에 흘리는 미치광이 모습을연출해 낸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의인의 터'와 '터가 무너짐'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시편 11편에 제시된 의인의 삶과 구원의 근거는 좀 더 크고 견고하다.
그 답은 모든 것을 아시고, 분별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일, '정직한 자'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나라에있다.
자신의 불법과 죄악됨이 하나님께 투명하게 드러난 정직함이 이 모든 허물을 사하신 하나님의 의로움과 만난다.
'의인의 터'는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자들이 누리는 삶의 장이다. (롬4:1-8, 시32:1-5)